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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겐 뜨거운 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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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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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잦은 술자리로 몸은 소진되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면…

여명이 채 밝아오기 전부터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밤을 새워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루 24시간 중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직업에 따라 각기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출퇴근 시간에 맞춰 직장에 다니지만, 연극이라는 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흡사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들처럼 밤이슬이 조금씩 낄 때부터 일을 시작해서 새벽이슬이 땅을 적시면 일을 마치곤 한다. 그래서 ‘연극인들은 화류계 종사자다’라고 자조적인 농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사진/ 김진수 기자
태양이 떠 있을 때보다는 땅거미가 질 무렵부터 우리의 일은 시작된다. 밤 두세시께 잠들고, 오전 열시, 열한시께 일어나 오후 한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오후 두시나 네시께 외출하는 것이 대개 연극인들의 생활리듬이다.

저녁 공연시간 두세 시간 전에 공연장에 나와 준비를 하고 공연을 마치고 나면 일찍 잠드는 사람들의 취침시간인 밤 열한시께. 이때부터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연극하는 사람들은 술을 좋아한다. 연극을 하면 술을 좋아하게 되는 건지,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연극을 하는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본인 역시 술을 좋아한다- 술집으로 출근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이면 당연히 귀가시간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연습을 한다든지 무대를 세운다든지 하다보면 철야작업은 기본이다. 생활리듬이 이렇다보니 건강과는 자연히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 도대체 무엇으로 원시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연극을 해내는 것일까? 자문해본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정신력이다. 촛불이 제 몸을 불살라 불을 밝히듯이. 그렇지만 건강한 정신에서 건강한 육체는 나오지 않는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오는 것이 필요불가결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연극인들에게는 건강한 정신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세상에는 으레 원칙이나 조건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연극인들이 그 이례적인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어쩌면 육체적인 나이로는 연극인들은 또래의 보통 사람들보다 족히 오년은 더 늙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나이로는 십년은 젊을 것이다. 항상 새롭고 창조적인 것들을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혈기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설적이지만, 일상에 젖어 지리멸렬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보다는 작품작품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보다,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연극인들의 건강 유지방법이 아닌가 한다. 나의 건강 유지법 역시 다른 연극인들과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채윤일 |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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