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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문학관다운 문학관이 그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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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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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실용적인 공간으로 이름난 ‘이효석 문학관’과 ‘토지문화관’을 찾아

유명한 작가가 태어난 곳, 글을 쓴 곳, 죽어 묻힌 곳은 그 산과 물의 아름다움 이전에 작가의 이름 덕을 본다. 유년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는 들판, 글쓰기에 몰두했던 집, 소설·시의 무대가 된 거리를 찾아 종이 속 공간으로 들어가는 묘미를 맛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름난 작가를 배출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문학관(文學館)을 세워 이를 ‘관광자원’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해왔다. 하지만 건물만 번듯하다고 해서 다 같은 문학관은 아니다. 전국에 문학관이란 문패를 단 집들은 많지만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곳은 손꼽을 정도다.

작가들에게 창작공간 내준 ‘토지문화관’

사진/ 5천여점의 자료를 갖춘 이효석 문학관은 봉평의 수려한 자연과 어울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자리잡은 ‘이효석 문학관’(033-330-2700)은 이 중에서도 튼실한 자료를 갖춘 아름다운 공간으로 이름 높다. 메밀은 아직 씨도 안 뿌린 때였지만 심미주의자 가산 이효석의 향기를 맡으러 5월16일 봉평으로 떠났다.


서울에서 강릉 방향으로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장평IC에서 나와 봉평쪽으로 10분쯤 차를 몰면 흥정천이란 제법 큰 개울 위에 남안교가 걸려 있다. 1930년대 재래장터 객줏집들이 재현된 봉평 읍내와 이효석 생가가 있는 남안동을 가르는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 물레방앗간을 지나면 오른편 언덕 위에 이효석 문학관이 동그마니 자리잡고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1930년대 어느 겨울날 찍었던 사진을 바탕으로 이효석의 집필 공간을 재현해놓은 코너가 눈길을 끈다. 양쪽 벽 옆엔 피아노와 축음기가, 책상 위엔 이효석의 즐겨쓰던 동그란 뿔테 안경이 있다. ‘MERRY CHRISTMAS’라는 은박 장식과 크리스마스 트리가 이채롭다. 책장 위에 걸린 액자 안에선 프랑스 여배우 다니엘 다류가 빙긋 웃고 있다. 모차르트와 쇼팽을 즐겨쳤으며, 원두커피는 꼭 갈아내려 마시고, ‘유별난 복식과 장식, 호사스러움을 추구하는 노블한 삶’을 원했던 스타일리스트의 방이다. 전시장엔 육필로 남아 있는 방송용 원고, 가족사진, 훈장을 비롯해 <메밀꽃 필 무렵>이 실린 일본어 소설집, 1960년대 초 김지미와 박노식이 주연한 <메밀꽃 필 무렵> 신문광고 등 유족과 연구자들이 기증한 흥미로운 자료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사진/ 1930년대 성탄절 무렵 찍은 사진(오른쪽)을 바탕으로 재현한 이효석의 방(왼쪽).
이곳엔 전시된 것말고도 자필원고, 이효석 문학과 관련한 논문, 초판본 등 5천여점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건물 뒤켠에 나무계단으로 꾸며진 산책로를 오르면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가 나귀를 끌고 걸어간 흥정천 둑방길과 봉평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메밀꽃이 피면 동네 전체가 그대로 소설이 될 것 같다.

문학관은 지역 주민을 위한 문학강좌, 대학생·일반인을 위한 문학캠프, 세미나·시화전·문학의 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러모은다. ‘가산문학 선양회’를 이끄는 김남극(봉평고등학교 교사)씨는 “동네 사람들이 모임, 산책 등을 위해 이곳을 자주 들러 지역 주민들에게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회촌마을 ‘토지문화관’(033-762-1382)은 이와는 다른 용도로 문화·예술인들이 애호하는 공간이다. 소설가 박경리씨는 <토지>를 집필했던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택지개발로 헐리게 되자 그 보상금을 내놓아 1999년 창작·예술 지원공간인 토지문화관을 열었다. 이곳엔 박경리씨를 기념하는 전시물은 없지만 병마와 싸우면서 텃밭을 일구고 한줄한줄 원고지를 채워갔던 작가의 혼을 이해할 수 있는 장소다.

‘청마 문학관’은 두개 지어질 위기

사진/ 원주 토지문화관은 세미나실·집필 공간으로 애용되고 있다. 오른쪽 귀퉁이에 보이는 집이 현재 박경리씨 자택이다.
현재 박경리씨가 살고 있는 처소 옆에 자리잡은 토지문화관은 회촌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낌없이 즐길 수 있다. ‘루’라고 불리는 베란다에 오르자 저 멀리 밭자락에서 소를 몰며 써레질하는 농부의 모습이 보였다. 모심기 전 흠뻑 물을 대놓은 논은 산봉우리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토지문화관은 이처럼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작가들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1년에 20~25명을 뽑아 100일 동안 무료로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토지문화관에서 한달째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 김영래씨는 “환경이 너무 좋아 서너달 걸리는 글을 한달 남짓 만에 마무리지을 정도로 진도가 빨리 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올 가을 이곳에서 쓴 글들을 묶어 중편집을 낼 계획이다. 서울에서 2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숙박을 겸한 학술·문학 세미나도 자주 열린다. 영 이뤄질 수 없는 꿈만 같던 청계천 복원 문제가 처음 공식적으로 거론된 세미나도 이곳에서 열렸다.

일반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도서관 개념의 문학관도 있다. 부산 해운대구 중2동 달맞이공원에 자리잡은 ‘추리문학관’(051-743-0480)은 1992년 추리소설가 김성종씨가 자비를 털어 문을 열었다. 추리소설만 6천여권, 일반 도서 3만여권이 있는 이곳 열람실에선 하루종일 너른 창문으로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추리소설에 심취할 수 있다. 관장 김성종씨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무에 물을 주는 것처럼 대가 없어도 공을 들이는 마음으로 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문학관이 자주 휘말리는 시비는 유족과의 갈등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유치환을 기념해 ‘청마 문학관’을 건립한 경남 통영시는 최근 유치환의 출생지가 거제시라고 주장하는 유족과의 소송에서 패배했다. 법원은 “유치환의 출생지를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로 표시한 청마 문학관의 안내문을 ‘유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표기하라”고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 출생지 논란이 벌어진 것은 옛 통영이 거제시와 통영시로 분리되면서 불거진 것인데, 거제시는 유족이 주장하는 출생지인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에 생가를 꾸며놓고 동랑(유치환의 형 유치진)·청마 기념관 건립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두곳에 문학관이 세워지는 웃지 못할 상황도 예상된다.

친일파 청산이 매끄럽게 이뤄지지 못한 현대사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친일문학인을 기념할 수 있느냐도 오래된 문제다. 전북 고창 ‘미당 문학관’은 2001년 개관 때부터 친일 기록을 전시하느냐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 결국 전시관 4층에 놓일 계획이던 친일 작품·참회록 등이 미당의 제자들의 반대에 부닥쳐 창고로 옮겨졌다. 현재 미당 문학관은 “친일파 문학관에게 지원금을 주지 말라”는 시민단체의 요구로 고창군의 자금 지원이 끊긴 상황이다.

김풍기 교수(강원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는 “문학관은 건물을 지은 이후가 더 중요하다. 지역주민·유족·후배·문인 등 운영을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한두명만 있어도 상황이 달라진다. 전시장뿐 아니라 작가·작품과 관련된 공간을 짜임새 있게 연결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창·원주=글·사진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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