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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매스컴의 ‘포로’가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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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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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논리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 독자와 시청자의 주체적 역할 찾아야

(사진/선정적인 기사를 내세우는 영국 황색언론들에게 다이애너비의 사생활과 죽음은 가장 확실한 장삿거리였다)
97년 8월31일 영국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애인과 함께 파리에서 차를 타고 가다 사고로 숨진 사건은 순식간에 전세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계인들의 눈과 귀를 잡아맸다. 영국의 신문들은 이 사건 이후 며칠 동안 최고 판매기록을 세웠다. <선>이 3900만부, <미러>가 2400만부를 팔았다. 다른 나라도 비슷했다. 우리나라의 한 신문도 다이애나의 사진을 1면에 큼직하게 실었을 정도다. 전세계 수백개의 텔레비전에서 다이애너의 장례식이 생방송으로 중계됐고, 남미에서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시차 때문에 잠을 설쳐가며 장례식 방송을 지켜봤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사원 모니카 르윈스키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스캔들은 98년 1월부터 전세계 신문의 국제면을 도배하기 시작해 몇달 동안 지긋지긋하도록 이어졌다. 한 인터넷 뉴스사이트가 백악관 주위의 소문을 기사화하면서 시작된 이 스캔들의 폭발력은 엄청났다. 미국 방송사들은 교황의 쿠바 방문을 취재하러 출장갔던 간판스타급 기자들을 모두 소환해 클린턴의 성생활을 취재했다. 미국의 거의 모든 언론매체들이 이 뉴스로 도배를 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미국의 일부 신문들은 “우리 신문에는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을 싣지 않습니다”라고 선전했을 정도였다.

커뮤니케이션 업체의 구세주, 선정성


그렇다면 과연 다이애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생각한 시청자들은 몇명이나 됐을까. 문화계 인사도 아니고 세계적 사상가도 아닌 한 이혼 왕족의 죽음이 도대체 영국도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클린턴 대통령이 공무수행과는 관련이 없는 사생활 속에서 일으킨 섹스 스캔들 역시 전세계 사람들의 삶에 무슨 연관성과 중요성이 있는 걸까.

이른바 정보의 시대다. 이제 정보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이 됐다. 정보를 취급하는 커뮤니케이션 업체들은 전화, 영화, 텔레비전, 광고, 비디오, 컴퓨터 관련 거대기업들과 합병하고 제휴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들로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거대화된 매체들이 서로가 서로를 베끼고 닮아지면서 엇비슷한 정보들을 쏟아내는 과잉매체화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정보를 팔아먹는 데 혈안이 돼 경쟁하다 난관에 봉착하자 일종의 구세주를 내세웠다. 실제 의미와 가치의 중요성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뉴스의 으뜸가는 소재로 삼게 된 것이다. 거대 커뮤니케이션 업체들은 정보를 더욱 많이 팔아먹기 위해 클린턴과 다이애나를 골랐고, 이 거대기업의 영향력에 놓인 세계 각 나라의 매체들도 이 뉴스들을 받아서 보도했다. 결국 원하든 원치 않든 전세계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는 중요한 의미가 별로 없는 이 두 가지 뉴스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매스컴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일반 대중에는 이런 커뮤니케이션계 내부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쉽사리 감지되지 않는다. 그저 감으로만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것같이 느낄 수는 있지만, 정확한 이유와 배경을 알기는 쉽지 않다. 정보를 주체적으로 선별하고 이해하기는 더욱 힘들고 그저 쏟아지는 텔레비전 화면과 신문기사를 보면서 커뮤니케이션이 제공하는 이미지를 진실로 믿어버리고 만다.

프랑스의 언론인 이냐시오 라모네의 책 <커뮤니케이션의 횡포>(원윤수·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 9천원)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정면으로 고발하고 비판하고 나섰다. 라모네는 이런 경향을 주도하는 미디어기업들이 틀을 짜는 산업구도 아래에서 정보는 그저 상품일 뿐이고, 미디어의 기본 사명인 민주적 토론을 밝히고 진작시키는 것을 압도해버리는 현실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정보 얻으려면 품을 팔아라

(사진/클린턴 미국 대통령 중요한 언론에 의해 끊임없이 증폭됐다)
글쓴이 자신이 언론인이기 때문에 라모네의 해석은 예리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신문을 누르고 언론을 제패하는 매체가 된 텔레비전은 이미지가 없는 것은 무시해버리면서 자극적인 이미지만을 양산하고, 텔레비전에 밀린 신문들은 폭로 저널리즘으로 맞서 선정성만 강해지고 있다. 치명적인 것은 언론의 주력인 기자들이 진정한 책임감을 지닌 분석자, 중계자가 아니라 언론기업주의 지시에 따라 언론사의 이익을 창출해야하는 단순노동자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기자들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수많은 뉴스들이 제발로 찾아오기 때문에 더이상 뉴스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지고, 그래서 더 게을러지고 뉴스를 발신하는 집단과 기업의 의도에 알게 모르게 휘둘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의…>은 이런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병폐를 생생한 사례들을 들어가며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비록 구미권의 사례들이어서 다소 생소하긴 해도 라모네가 뜻하는 바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하는 것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들인 독자와 시청자들이란 점을 라모네는 강조한다. 커뮤니케이션 시대는 대중에게 정보를 다루는 데 있어 편리함과 용이함을 줬지만 대신 정보를 얻는 것이 수용자 주체의 적극적 의지의 실천 행위라는 점을 잊게 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고, 클릭 한번으로 화면에 뜨는 정보를 보는 것을 정보를 얻는 것이라고 믿는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정보를 얻기 위해 품을 팔고 그것을 자기것으로 체화하려고 수용자들이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정보를 얻기 위해 공을 들이는 대가를 치러야만 시민들은 민주주의적인 삶에 현명하게 참여할 권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모네, 프랑스 진보 언론의 대명사

이냐시오 라모네(사진·57)는 프랑스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장이자, 파리 7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다. 기호학과 문화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디어와 지정학 부분을 연구해오면서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와 함께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학자로서보다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언론인이자 논객으로 더욱 유명하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프랑스의 정론지 <르 몽드>의 자매지로 <르 몽드>보다 훨씬 진보성향이 강해 프랑스 진보진영과 좌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라모네는 바로 이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매주 1면 오른쪽 상단에 자신의 고정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의 칼럼은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으로 프랑스 진보진영과 시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프랑스 진보주의자들은 라모네의 칼럼을 읽는 것으로 그 주를 시작한다고 할 정도다. 라모네는 이 칼럼을 통해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경제가치 제일주의에 맞서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는 프랑스 특유의 성향을 대표하고 이끌어왔다.

라모네는 특히 지난 97년에는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대표를 맡고 있는 베르나르 카센과 함께 환차익과 금리차익을 노려 세계 금융시장을 넘나드는 국제투기자본에 대한 규제를 주창하는 기사를 써서 프랑스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투기자본에 재갈을 물리는 토빈세법 도입을 촉구하는 그와 카센의 기사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해 수천통의 편지를 보냈고, 이후 투기자본 규제와 토빈세 실시를 모토로 하는 시민단체 ‘아탁’이 결성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후 아탁은 다른 나라의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 시민단체들과 연계해 범세계적인 투기자본 반대운동을 벌일 정도로 발전한 바 있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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