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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리다가 사랑한 그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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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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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입담, 상상력으로 버무린 34일간의 여정,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화가는 세상을 손끝으로 만난다.

최근 몇년 새, 옛날 베이징에서 로마까지 비단을 실은 상인들이 오갔다는, 그래서 동양과 서양이 이 길을 통해 만났다는 실크로드 여행기들이 꽤 출판됐다.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한겨레신문사)은 그래서 어쩌면 뒤늦게 나온 책인 듯도 싶다. 그러나 이 책에 가득 실린, 박재동 화백이 직접 그린 500여장의 스케치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사람은 다 다르고 똑같다”


한겨레신문의 만평 ‘한겨레 그림판’을 그렸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박재동 화백은 2000년 10월 영화감독 장선우, 소설가 김영종, 고고미술사학자 이주형, 애니메이션 감독 오승윤씨 등 20여명과 함께 34일 동안의 여행을 떠났다. 딸이라는 이유로 자기를 버린 아버지인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쇠갓 쓰고 무쇠신발 신고 서천서역으로 감로수를 구하러 떠났던 바리데기 공주 설화를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한 취재 여행. 바리데기가 지나간 여정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와 겹친다.

중국 쯔진청(자금성)에서 출발해 인도의 델리에 이르기까지 박재동 화백은 펜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펜들을 다 써버린 다음에는 동료들의 펜까지 빌려서 힘이 닿는 대로 스케치를 한다. 유명한 유적지의 풍경과 함께 여행하는 동료들,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모두 펜으로 그린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들과 친해지고 함께 나눈 대화는 모두 조그만 쪽지에 기록해나갔다. 만리장성을 가득 메운 시골 곳곳에서 올라왔을 사람들, 진시황 병마용갱에서 나온 병마용들의 다양한 표정, 음식점의 악공과 무희, 꽃파는 소녀, 둔황석굴 안의 불상들, 달밤의 사막, 사람들은 사라진 채 고스란히 남아 있는 1천년 전 도시….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이 밥 먹고 쇼핑하는 동안에도 혼자 주저앉아 그린 그림들은 낯설고 낯선 사람들과 나눈 일종의 대화다. 실크로드의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림 그리는 박 화백 주위에 몰려들고, 때론 그림을 그려달라 조르기도 한다. 그는 그려준다. 그림으로 말 안 통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그가 부러워진다.

“사람은 다 다르고 똑같다”는 말에 동감하면서 떠난 그는 결국 그곳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톈산산맥 기슭의 호수 바양블라크에서 만난 눈먼 몽골족 소년 키티붐바이가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천당〉을 듣고는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지상에 떨어진 천사의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아니 그냥 초원이었다. 그 속의 황금덩어리 같은 풀잎이었다. 만리장성과 병마용과 둔황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이… 한줄기 눈물에 씻겨 내려가 버리고 있었다…. 노을 속의 그 눈물은 우리 여행의 정점이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실크로드, 사막, 초원, 유목민에 대해 현대인이 가지기 쉬운 피상적 이해에 빠질 위험에서 구해준다. 말과 낙타에 짐을 싣고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이사가는 가족의 행렬을 만난 그는 “대여섯살 돼보이는 어린아이부터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낙타를 타고 일렁일렁 이동하는 모습이 욕심이 없고 마음 가뿐한 한폭의 그림 같았다”고 느끼지만 다시 가난을 이상화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가난했던 40년 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보는 정겨운 모습이지만 혹여 피상적이고 목가적으로 볼까 스스로 경계한다”.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하고, 부유하지만 그들보다 나을 것 없는 자신과 한국 사람들의 현재 삶을 돌아보기도 하는 다양한 고민들이 와닿는다.

좌충우돌 모험담도 읽을 맛

그림과 사람과 고민들을 통해 이 책은 자연스럽게 실크로드에 대한 선입견을 넘어선다. 실크로드라는 말은 중국과 로마 두 거대한 나라 사이 길고 긴 여정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게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나름의 삶을 꾸려왔다는 것. 또 사막 위의 유목민들의 삶은 목가적이거나 낭만적인 ‘우리의 과거’로 이상화될 수 없다는 것, 모래바람 불어오는 거친 환경에 적응한 힘겨운 노력이 있다는 것을 행간에서 느끼게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는, 강도 우물도 없는 황량한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에, 마을이 있고 밭에 식물들이 자라고 양들이 풀을 뜯는 것은 멀고 먼 만년설이 있는 톈산산맥에서 마을까지 땅굴을 파고 그 굴 속으로 만년설 녹은 물이 흘러들어오도록 한 사람들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솜씨뿐만 아니라, 입담과 상상력 또한 만만치 않은 박 화백은 개성 강한 20여명 일행이 벌이는 좌충우돌 ‘모험담’과 ‘배설’을 위해 끙끙댄 일 등 여행의 일상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기록해 사람들을 만나고 결국 나를 만나는 여행의 묘미를 생생하게 맛보게 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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