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느긋함이 보약일세

459
등록 : 2003-05-14 00:00 수정 :

크게 작게

하루에 두번 걸어 아파트 14층 오르내리기… “밥 먹고 합시다”외치는 건 좋은 습관

아직은 심각하게 건강을 걱정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보다는 건강을 따로 생각할 여유가 없이 각박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새벽같이 출근하자마자 전날 발생한 각종 사건·사고와 수사진행 사항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다. 의문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둥, 강도를 당해 피해자가 많이 다쳤다는 둥, 살인사건수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다는 둥의 보고를 받다보면 아침부터 머리에 쥐가 나는 듯하다.

끝없이 밀려드는 사건·사고들의 진실이 제대로 파헤쳐지는지, 그 과정에서 억울한 피해자들은 없는지,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 혹시 빠져나가는 경우는 없는지, 시간은 촉박한데 상부에서는 닦달을 하고 기자들은 끊임없이 전화를 해댄다. 평온한 여유라고는 찾아볼 틈이 없으니 참으로 처량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출근하면서 굳게 결심했던 담배 끊기는 이내 허무하게 무너진다.

늦은 밤 귀갓길에서까지 풀리지 않는 사건의 실마리를 골똘히 생각하다 쓰러져 잠이 들기 일쑤다. 가끔은 폭음에 과다한 흡연까지 하니 도대체 내가 살아가고 있는지 죽어가고 있는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아직 별 탈 없이 지내는 것은 이제 40을 갓 넘긴 나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날 이때까지 잔병치레 한번 없이 살아올 수 있게 잘 낳아준 부모님의 은공이 아니었으면 무탈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 들어 아내가 부쩍 나의 무모한 세상살이에 걱정을 늘어놓으며 “건강관리는 가장으로서 마땅한 의무”임을 주지시킨다. 그럴 때면 은근히 걱정이 되고, 정말 이러다 가족에게 내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계단 오르내리기다. 하루 두번에 불과하지만 아파트 14층을 걸어서 다닌다. 가급적 지하철을 이용해 출근하며, 조금이라도 걷고, 또 계단 오르내리기에 힘쓴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무것이나 잘 먹는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밥 먹고 합시다’를 외치며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도 꽤 좋은 습관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타고난 느긋함이 나에게 가장 큰 보약이 아닌가 한다. 느긋하게 생각함에 보태어 나는 항상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위기가 닥쳤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잽싸게 전화위복을 떠올리고 새옹지마를 생각하며 근심을 지워버리려 노력하고 실제로 그다지 걱정이 없다.


화가 나고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해본다.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되지 않으면 그냥 잊어버리려 노력한다. 성냄과 미워함을 잠시도 갖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처한 열악한 상황 아래서는 그저 열심히 일하고, 감정을 다스려 근심을 줄이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것 외에 달리 내 몸을 돌보기는 힘들 듯하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게만 해도 건강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또 낙관적으로 생각해본다.

황운하 | 경정·서울 강남경찰서 형사과장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