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거 3인방 서재응·김병현·최희섭은 모두 광주일고 1년 터울 선후배 사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스포츠처럼 이 속담이 잘 들어맞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특히 저변이 탄탄한 야구는 더욱 그렇다. 한국 최고의 투수 선동렬(43·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은 광주일고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고, ‘홈런왕’ 이승엽(27·삼성 라이온스)도 경북고에 다닐 때 한국 청소년대표팀 기둥 투수로 활약했다. 어디 이뿐인가. 송진우(37·한화 이글스), 이종범(33·기아 타이거즈), 마해영(33·삼성 라이온스) 등 내로라 하는 프로야구 스타들이 대부분 고교 때부터 이름을 날린 선수들이다.
청룡기대회 ‘화려한’ 결승
올 시즌 박찬호(30·텍사스 레인저스)를 대신해 미국프로야구에서 ‘코리안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최희섭(24·시카고 컵스)과 김병현(25·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서재응(26·뉴욕 메츠)도 고교 때부터 ‘될성부른 떡잎’들이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광주일고를 1년 터울로 졸업한 선후배 사이라는 것이다. ‘3인방’이 그라운드를 함께 누빌 무렵 고교야구는 프로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광주일고는 그 중심에 있었다.
1995년 6월9일 서울 동대문운동장. ‘야구 명가’ 광주일고와 ‘신흥 명문’ 덕수상고(현 덕수정보고)가 제50회 청룡기대회 결승에서 만났다. 35로 뒤지고 있던 덕수상고의 9회말 투아웃 마지막 공격. 타석에는 덕수의 4번 타자 방호준이 들어섰고, 광주일고의 마운드에는 2학년생 김병현이 버티고 있었다. 김병현에게 이미 두 차례 삼진을 당한 방호준은 사생결단으로 덤벼들었지만 김병현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병현은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8구째 절묘한 슬라이더를 던져 방호준을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2만여 관중석에서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광주일고 선수들은 마운드로 달려나가 김병현을 하늘 높이 헹가래쳤다.
김병현은 선발로 나와 6회까지 5피안타 1자책점(2실점)으로 잘 막은 뒤 3루수로 잠시 교체된 뒤 8회 무사만루에서 다시 마무리 투수로 나와 삼진 5개를 뽑아내며 팀의 53 승리를 지켜냈다. 그는 이날 무려 18개의 삼진을 뽑는 등 고교 수준을 뛰어넘는 기량을 뽐내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성적만 봐서는 김병현의 ‘원맨쇼’가 펼쳐진 경기였다. 하지만 이 경기는 다른 의미에서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만했다. 8년 뒤 미국 본토 야구무대에 우뚝 선 코리안 메이저리거 ‘3인방’이 나란히 한 유니폼을 입고 뛴 결승전이기 때문이다.
당시 광주일고에는 김병현말고도 3학년생 서재응이 3루를, 신입생 최희섭은 1루를 지키고 있었다. 최고참 서재응은 김병현에 이어 7회부터 마운드에 올라 1이닝 동안 1피안타 무자책점(1실점)으로 잘 막아 대회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막내 최희섭은 1학년임에도 4번을 치고 있었다. 그는 결승전에서 4타수 무안타에 그쳤지만, 결승에 오르기까지 5할대의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팀의 공격을 주도했다. 광주일고는 그해 청룡기 우승말고도 무등기 대회 3위, 전국체전 3위 등 상위권에 입상하면서 선동열, 이종범 등 쟁쟁한 선배들이 세운 전통을 이어갔다. 당시 고교야구는 충암고와 덕수상고, 휘문고 등 강팀들이 많아 ‘춘추전국시대’라 불렸지만, 3인방이 버티고 있던 광주일고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도드라졌다.
허세환 감독의 놀라운 눈
당시 김선우(몬트리올 엑스포스·당시 휘문고)와 투수 랭킹 1, 2위를 다투던 박명환(두산 베어스·당시 충암고)은 “당시 실력이 엇비슷한 팀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광주일고는 단연 강팀이었다”며 “특히 2학년인 병현이는 체구가 작은데도 공이 빨라 다른 팀 타자들이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하일성 한국방송 해설위원도 “95년 고교야구에는 훌륭한 재목감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병현이와 희섭이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병현이는 언더스로 투수임에도 공이 빨라 경쟁력이 있었고, 희섭이는 큰 덩치에 비해 유연성이 좋아 대성할 싹이 보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허세환(43) 광주일고 감독이 없었다면 현재의 3인방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 선수 모두 허 감독의 결단으로 지금의 포지션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최희섭의 경우 애초 투수로 키울 목적으로 스카우트됐다. 광주일고는 그를 서재응과 김병현이 졸업한 뒤 기둥 투수로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자로 대성할 수 있는 체격 조건과 기량을 포기하는 게 너무 아까웠다. 허 감독은 “희섭이는 투수를 시키면 방망이가 잘 안 맞아서 한 가지만 집중해야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타격 소질이 더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결국 최희섭은 허 감독의 결단으로 타자의 길을 걷게 됐다.
김병현도 무등중학교 때까지 유격수로 활약했다. 체구가 작고 빨라 수비 반경이 넓었기 때문에 유격수로 제격이었다. 하지만 가공할 만한 손목 힘을 그냥 두기가 너무 아까웠다. 공을 던질 때 손목으로 채는 힘이 좋아서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다. “투수 연습을 시켜봤는데 생각한 대로 공이 좋았죠.”(허 감독) 김병현은 체구가 작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밤마다 강도 높은 웨이트트레이닝을 소화했다. 서재응은 충장중학교 때 3루수였다. 그러나 공 던지는 자세가 ‘예뻐서’ 허 감독으로부터 투수 조련을 받았다. 그는 김병현과 마운드를 번갈아 지키면서 광주일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은사의 충고는 어떠할까
서재응은 1997년 135만달러에 뉴욕 메츠에 입단했고 올 시즌 처음으로 메이저리거가 됐다. 그는 지난 3월18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의 경기에서 7회 동안 5피안타 무실점으로 잘 막아 감격의 첫 승을 따냈다. 지난 시즌까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마무리투수로 활약하다 올해 선발로 보직을 바꾼 김병현은 ‘원투 펀치’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이 부상으로 부진해 사실상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인 타자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거가 된 최희섭은 현지에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로 빼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고교 ‘은사’의 머릿속에 이들은 어떤 인상으로 남아 있을까. “재응이는 낙천적이었고, 희섭이는 과묵하면서도 선배들을 잘 따라 인기가 많았죠. 병현이는 좀 내성적이었고.” 허 감독은 제자들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희섭이는 좀더 공격적으로 나서서 거포 이미지를 확실히 구축하는 게 필요합니다. 재응이는 직구 위주의 투구를 피해야 하고. 병현이요 그 몸집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대견스럽죠. 정말 대단한 아이에요.”

사진/ 김병현은 95년 청룡기대회 결승에서 무려 18개의 삼진을 뽑는 등 ‘원맨쇼’를 펼치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AP연합)

사진/ 뉴욕 메츠의 서재응(왼쪽)과 시카고컵스의 최희섭. 이들은 모두 허세환 광주일고 감독의 결단으로 포지션을 전환했다.(AP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