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보셨나요, 물방개 노는 옥상

459
등록 : 2003-05-1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작은 생태계가 살아 숨쉬는 옥상정원… 도심 빌딩숲 위에 아늑한 녹색 쉼터가 있다

개구리가 갈대를 헤치고 폴짝 튀어오른다. 소금쟁이가 기다란 발로 수면 위를 지친다. 연못 안에선 진흙 사이로 물달팽이가 느릿느릿 기어간다. 뽀드득 소리가 날 듯 탱탱한 잎사귀를 지닌 메발톱, 빵빵한 주머니처럼 부풀어오른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단 금낭화가 한창이다. 화살촉과 비슷하다 하여 화살나무라고도 불리는 참빗나무, 원숭이가 올라가도 떨어진다는 매끈매끈한 줄기의 배롱나무가 자태를 뽐낸다. 풀숲 너머 그늘가에선 얼기설기 엮은 나무 장작에 표고버섯도 달렸다. 넋놓고 들여다보다 고개를 들어보면 저 앞에 명동성당 종탑이 보인다.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아참, 여긴 명동이지.’

동식물이 공생하는 작은 우주

사진/ 지난달 공개된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옥상정원 ‘작은누리’. 동식물이 공존하는 소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서울 명동에 그런 데가 있었나. 궁금하다면 옛 국립극장 맞은편 유네스코회관 12층 옥상에 올라가보라. 보름 전에 개장한 옥상공원 ‘작은 누리’는 이름 그대로 다양한 생명들이 꿈틀대는 ‘작은 세상’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어둑한 계단참을 지나 옥상 출입문을 열면 탄성이 터진다. 기계실과 허드레 물건들로 삭막했던 콘크리트 바닥에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정원을 꾸몄다. 물탱크를 빙 둘러가며 만든 정원은 구역별로 테마를 정해 190평의 작은 공간을 알뜰히도 채웠다. 유네스코 직원들이 키우는 채소밭을 지나면 민들레·할미꽃·봉숭아 등 어릴 적 보던 정다운 우리 꽃이 보인다.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면 딱 맞을 등나무 정자(파골라)를 기점으로 ‘작은 누리’의 하이라이트인 습지가 나타난다. 어른 대여섯이 발을 담그면 넘칠 것 같은 조그만 연못을 팠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연못물이 고여 있지 않다. 못보다 기울기가 낮게 설계된 물길을 따라 연못물이 졸졸 흘러 애기부들·줄·미나리아재비·골풀이 자라는 습지로 흐른다. 정원연못 옆에 놓인 태양전지는 이 물이 흙 밑을 거슬러올라 다시 연못으로 돌아오는 데 쓰이는 동력을 제공한다. 물은 이렇게 순환하며 자체 정화된다. 물탱크 위에서 받은 빗물도 이 연못으로 흘러든다. 꽃·나무·풀·땅·물이 있어 ‘작은 누리’는 생태계 사슬을 완성한다. 꽃이 있어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곤충이 있어 동물도 살아간다. 처음엔 개구리·올챙이만 연못에 넣었는데, 못 밑을 채운 논흙에서 묻어왔는지 물방개·잠자리유충 같은 것도 어느새 이사를 왔다. 사람 눈에만 예쁜 정원이 아니라 동식물이 공생하는 작은 우주가 만들어진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교류센터 김승윤 팀장은 “유네스코회관 옆엔 중국대사관의 너른 정원이 있어 작은 녹지축을 형성하게 됐다”고 말한다. 사람과 자동차가 일으키는 매연·먼지가 가득한 명동이기에 ‘작은 누리’가 찍는 녹색 쉼표는 더욱 소중하다.

사진/ 런던 데리 톰스 옥상정원에서는 1930∼40년대 영국 사교계의 중요행사가 열리곤 했다.
이처럼 옥상정원을 하나의 완결된 생태계로 이해하게 된 것은 최근 5년여의 짧은 기간에 이뤄진 일이다. 1998년 문을 연 경기도 성남시 분당새도시의 경동보일러사옥 ‘하늘동산 21’은 옥상에서도 소생태계가 가능한지를 실험한 첫 사례였다. ‘하늘동산 21’과 ‘작은 누리’를 시공한 조경회사 에코텍의 김현규 대표는 “건물이 들어서면서 망가뜨린 자연을 다시 복원하고 도심 안에서 멸종해가는 동물들이 살 수 있는 서식공간을 만들어 새로이 생태계를 창출한다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애초 옥상정원은 ‘인간적 관심’에서 시작됐다. 회색 콘크리트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해줄 녹색이 필요하고, 땅값이 비싼 도심에 정원 만들 땅은 없으니 자연히 지붕 위로 시선이 쏠린 것이다. 도시관리 차원에서 최대한 녹지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도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건물 구조가 정원에 쓰일 자재와 토양의 하중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식물에 필요한 물의 공급과 배수, 방수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김현수 수석연구원은 90년대 중반부터 이런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저관리·경량형 모델을 개발해왔다. 그는 건물의 구조진단을 비롯해 방수·배수, 토양층의 조성, 식물의 선택 등 옥상정원 만들기에 필요한 기술을 실험·연구해 표준 모델을 제시했다. 이런 방법은 생태계 조성보다는 건축물에 ‘그린 커버’를 씌워 건축과 도시의 물리적 환경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사진/ 환자들의 소중한 쉼터가 된 서울 영등포구 당산3가 영등포병원(왼쪽,오른쪽위). 서울 종로구 누하동 환경운동연합은 ‘푸른 지붕’이 찜통더위를 다소 식혀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오른쪽아래).

건물 내부 온도 낮추는 환경 효과도

지난해 말 완공된 서울 종로구 누하동 환경운동연합 옥상정원도 이런 점에 초점을 맞췄다. 2001년 살림집을 개조해 지어진 이 건물은 통유리를 남쪽벽 전면에 끼워 여름이면 따가운 볕에 그대로 노출돼 실내온도가 47도까지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때문에 환경운동연합에선 여름마다 에어컨 사용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다 지난해 천연가스를 쓰는 난방장치를 쓰기로 결론이 나기도 했다. 김미현 총무부장은 “옥상정원은 약 2도가량 온도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 가장 더운 3층 사무실이 좀더 시원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의 옥상정원은 이런 환경적 효과말고도 장점이 많다. 경사진 지붕 위엔 태양열을 모으는 집열판 300여개가 촘촘히 놓여 있는데 그 아래로 잔디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푹신푹신한 잔디 위에 앉으면 북동쪽 저 멀리 청와대가, 가까이로는 종로의 옛 한옥 기와지붕이 보인다. 지붕 가장자리엔 물에 흙이 쓸려내려가지 않도록 흰 조약돌을 깔았다. 환경운동연합은 이후 옥상정원에서 여과된 빗물을 모아 허드렛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사를 벌일 계획이다.

뭐니뭐니해도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옥상정원의 장점은 회색건물에 지친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5월8일 낮 서울 영등포구 당산3가 영등포병원 옥상에 오르자 카네이션을 가슴에 단 환자가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점심을 들고 있었다. 정형외과·신경외과가 유명한 이 병원은 장기입원 환자가 많은데도 이들이 잠깐 숨을 돌릴 휴게공간이 한곳도 없었다. 병원 건물도 20년이 넘어 줄곧 실내에서 지내야 하는 환자들은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에 잔뜩 눌려 있었다. 윤용권 사무국장은 “평균 110명의 입원 환자 중 매일 60~70%가 옥상을 찾는다”고 전했다.

사무실의 답답한 공기에 멍해질 때, 옥상에 올라 나무그늘 아래 큰 숨을 내쉬면 얼마나 좋을까. 주변 건물 옥상에도 점점이 푸른 섬들이 떠 있다면 우리의 눈은 더욱 즐거울 것이다.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