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거북이 마라톤

459
등록 : 2003-05-1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일러스트레이션 | 최선영
1모작 못자리에 터널·노지 고추, 담배까지 심어놓은 우리 동네 어른들 일손이 다소 헐렁해 보인다.

그러나 간척지가 광활한 백수나 염산 들녘은 보리이삭이 누렇게 제 살 찌우며 여문 알곡을 키워내는지라 2모작 못자리로 오히려 분주하다.

5월5일 어린이날이라고 특별히 갈 곳도 행사도 거의 없는 아이들과 어른들은 인근 고창 선운사나 함평 나비축제 인파가 되어버리고 들녘에 엄마아빠를 빼앗겨버린 아이들은 일찌감치 ‘영광사랑 에너지절약 거북이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학교 운동장에 진을 치고 있다.

11년간 5월5일이면 어린이 민속잔치를 해온 원불교가 ‘핵정책 전환과 에너지 절약을 위한 캠페인’ 마당으로 올해는 온 가족이 참여하는 거북이 마라톤을 열었다.

아직 시작하려면 2시간이나 남았는데 친구들과 일찌감치 온 아이들은 풍선도 불고, 방사능 피폭 피해 사진도 보고, 얼굴에 그림도 그려넣으며 어린이날 분위기에 들떠 있다.

거북이 마라톤이라서 그런지 할머니부터 유모차 탄 갓난아이까지 1500명이 주최쪽이 나눠준 흰 티를 입고 출발선에 선다. 1등도 없고 꼴등도 없는 오직 ‘환경을 생각하는 걷기 행사’인 셈이다.

영광 외곽을 빙 돌아 6.4km를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가뜩이나 움직이기 싫어하는 큰놈은 입이 불었고 작은놈은 멋모르고 까분다. 연휴 맞아 쉬러 온 막내시누이까지 내 등쌀에 마지못해 끌려나오고 첫 번째 난코스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아이들의 인상이 일그러지고 어른들은 업고, 끌고 하며 발걸음을 다그친다. 곳곳의 식수대 물은 동이 나고 마을 입구의 구멍가게는 음료수를 찾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미어터진다. 길가 담배밭에는 허리 구부린 할머니가 담배붓(비닐 위로 자란 담배순을 흙으로 덮어 모아주는 작업)하던 일손 놓고 걷는 사람 구경에 빠져 있다.

가게 들러 오느라 뒤처지니 둘째딸 무등 태운 민주 아빠도 보이고, 학교에서 투포환 선수로 뽑혔다는 백수 회원 아들놈도 친구들과 뛰어간다. 구두에 양복바지 차림인 할아버지들도 무리지어 잰걸음을 놓으신다. “오메오메 다 왔어라우. 못 걸을 줄 알았는디.” 손자와 함께 걸으신 할머니는 아직도 힘이 남아 있는 목소리다. 내 뒤의 꼬리도 제법 길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행운권 추첨에 환호하고 3명의 휠체어를 탄 아이들이 박수를 받으며 마지막으로 골인한다. 130명을 뽑는 행운권에는 하나도 당첨 못 되었어도 끝까지 완주한 아이들이 고맙다.

둘째아이는 우라늄에 피폭된 아이들 사진을 눈여겨보았나 보다. 다리에 종양 난 아이 모습을 자꾸 되뇐다. 후대에게 안전한 땅을 남겨주는 작은 일에 참여했다는 뿌듯함이 아이들에게도 전염되었을까 백수 해안도로 공원에서 점심 먹는 아이들 모습이 상기되어 있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영광댁 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