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역사 양쪽에서 양육강식 이론의 허구를 파헤치는 두권의 책
19세기 유럽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과학’이라는 경지에 올려놓는 새기술을 선보였다. “약한 자는 사라져야 하고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약육강식’ 이론은 동물의 세계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까지 설명하는 자연불변의 법칙이며 숙명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에서는 군대가 세계 곳곳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처참하게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 동안, 과학자들은 생물학의 이름을 빌려 강한 힘을 가진 동물들이 무리를 지배하고 약한 동물을 죽이는 것이 불변의 자연 법칙이며 숙명이라고 전 세계 사람들을 세뇌시켜왔다.
정말 그럴까 동물이나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대신 남을 죽이고 짓밟아야 하는 것일까 새로 나온 두권의 책, <휴머니즘의 동물학>(이마고)과 <야만의 역사>(한겨레신문사)는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역사 양쪽에서 ‘약육강식’ 이론의 허구를 파헤치고 정면으로 도전한다.
‘힘센 수컷’은 마초적 편견
독일의 동물학자이며 심리학자인 비투스 드뢰셔는 <휴머니즘의 동물학>에서 ‘힘센 수컷이 무리와 영토를 지배하고, 힘없는 암컷들은 수컷의 성적 노예일 뿐’이라는 기존 생물학의 이론은 “남성 생물학자들의 마초적 편견이 투사된 것”이라고 꼬집는다. 드뢰셔는 실제로 최근 150여명의 학자가 개미부터 사자까지 200여 가지 동물들의 삶을 연구한 결과들을 토대로 동물사회의 보편적 생존전략은 폭력과 대결, 갈등이 아닌, ‘평화주의’와 ‘이타주의’에 기초한 연대와 협력임을 입증해 보인다. 초원에 사는 사바나개코원숭이 사회에서 가장 젊고 공격적인 수컷들이야말로 무리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패배자들이다. 암컷들이 확고한 우정을 가지고 무리를 이끌며, 공격력이 약하고 점잖은 수컷들은 암컷들과 공존하며 좋은 대우를 받는다. 힘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폭력적인 수컷은 무리에서 떨어져나가 외롭게 살아간다.
수컷이 우두머리가 되는 늑대나 야생닭의 세계에서도 우두머리의 역할은 폭력으로 다른 무리를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의 협조와 이해를 바탕으로 지혜롭고 민주적으로 무리를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만약 인간의 회사처럼 운영되는 늑대 무리가 있다면 자멸하고 말 것”이라고 단언한다. 물론 동물에겐 공격성이 있지만 이는 ‘필요악’이 아니라 통제되어야 할 것이며, 약자에 대한 강자의 승리는 더 이상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드뢰셔는 “남성학자들은 실험실과 연구실에 틀어박혀 출세의 발판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면서 자신들의 폭력적인 남성관에 의해 걸러진 동물들의 폭력성만을 부각시켰다”고 말한다. 자신의 세계관에 의해 거꾸로 과학의 결론을 끌어냈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당연히 힘센 수컷이 무리를 이끄는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 제인 구달, 스텔라 부루어, 다이앤 포시, 셜리 스트럼 등 여성 동물행동학자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동물들과 수십년 동안 지내면서 이들의 삶을 자세히 관찰하고 가장 강한 존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남성적 생물학의 폭력 이론이 오류임을 입증했다.
스웨덴의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야만의 역사>에서 이런 잘못된 약육강식 이론이 유럽인들의 정신세계 속에 어떻게 자리를 잡고 적용됐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항해하는 도구가 되는 것은 1899년에 조셉 콘라드가 쓴 소설 <어둠의 한 가운데>다. 러시아의 식민지가 된 폴란드 출신으로 유럽을 떠돌다 영국에 정착한 콘라드는 1889~1890년 벨기에 식민주의자들이 콩고에서 저지른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을 목격한 뒤 이 소설을 썼다. 콩고의 밀림 속에서 무역출장소를 운영하는 커츠는 엄청난 상아를 회사에 보내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중병으로 죽어간다. 커츠를 구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 선장 말로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공포로 지배하면서 서서히 미쳐간 커츠를 만난다. 커츠는 그에게 “모든 야수들을 절멸하라”는 글을 남긴다. (<어둠의 한 가운데>는 <지옥의 묵시록> <아귀레 신의 분노> 등 많은 영화의 원작이며 제국주의의 잔악함을 내부에서 비판하고 성찰한 작품인 동시에 원주민들을 타자(他者)화하는 유럽인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린드크비스트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을 찾아가 떠돌며 <어둠의 한가운데>를 되짚어가면서 유럽 근대 정신사의 ‘어둠’의 뿌리를 찾아간다. 콘라드와 같은 시대 사람들인 탐험가 스탠리나 생물학자 퀴비에, 다윈, 월러스 등의 사상을 통해 서구인들 내면의 지층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과 내면까지 성찰하면서 근대 유럽인들이 ‘타자=비유럽인’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종주의의 깊은 뿌리를 드러낸다.
원주민 절멸을 돕는 것이 자비다?
19세기 유럽의 생물학자들은 유럽인이 모든 다른 인종들 위에 있음을 ‘증명하면서’ 발달한 유럽인들이 야수와 비슷한 단계인 원주민들의 절멸을 돕는 것이 ‘자비’라고 주장했다.
고생물학의 창시자인 프랑스의 조르주 퀴비에는 저서 <동물의 왕국>에서 흑인이 영장류에 접근해 있다며 “이 인종에 속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완전히 야만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생물학자 로버트 녹스는 ‘검은 인종들’에 대해 쓰면서 “모든 인종이 백인 인종보다 열등하고 검은 인종들은 문명화될 수 없으며 저열하며 소멸돼야 할 운명이라고 썼다. 19세기 동안 하등인종을 절멸시킬 수 있는 강한 인종의 권리는 자연법칙이고 자연적 세계발전의 한 단계로 설명됐다.
학자들의 이론으로 뒷받침된 인종 말살의 기록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1519년 유럽인들이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2500만명의 원주민이 있었으나 100년 안에 150만명만이 남았다. 지금의 미국으로 알려진 곳에는 500만명의 토착민이 살았지만 1891년 운디드니 대학살 무렵 25만명만이 살아남았다.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의 테즈메이니아 섬에 최초의 식민주의자들 36명이 1803년 도착한 이후 벌어진 대학살로 1876년 테즈메이니아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져 유골이 박물관에 전시됐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이해할 수 없는 특수 상황이 아니라 근대 자연과학 논리의 자연스런 결론이었다. 원주민들은 유색인종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유럽인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됐을 뿐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독일의 동물학자이며 심리학자인 비투스 드뢰셔는 <휴머니즘의 동물학>에서 ‘힘센 수컷이 무리와 영토를 지배하고, 힘없는 암컷들은 수컷의 성적 노예일 뿐’이라는 기존 생물학의 이론은 “남성 생물학자들의 마초적 편견이 투사된 것”이라고 꼬집는다. 드뢰셔는 실제로 최근 150여명의 학자가 개미부터 사자까지 200여 가지 동물들의 삶을 연구한 결과들을 토대로 동물사회의 보편적 생존전략은 폭력과 대결, 갈등이 아닌, ‘평화주의’와 ‘이타주의’에 기초한 연대와 협력임을 입증해 보인다. 초원에 사는 사바나개코원숭이 사회에서 가장 젊고 공격적인 수컷들이야말로 무리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패배자들이다. 암컷들이 확고한 우정을 가지고 무리를 이끌며, 공격력이 약하고 점잖은 수컷들은 암컷들과 공존하며 좋은 대우를 받는다. 힘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폭력적인 수컷은 무리에서 떨어져나가 외롭게 살아간다.

사진/ 〈휴머니즘의 동물학〉 비투스 B. 드뢰셔 지음. 이영희 옮김. 이마고 펴냄

사진/ 〈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한겨레신문사 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