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정악 음반 <하늘과 땅…> 내놓은 김정자 교수, 선비 음악의 정수를 말하다
세상이 느릿느릿 흘러가던 때가 있었구나.
김정자 서울대 국악과 교수가 새로 내놓은 가야금 정악 음반 <하늘과 땅 그리고 명상>(C&L 뮤직)은 깨끗하고 힘있는 울림 속에서 평화로운 여유를 실감하게 한다. 장고나 북, 피리의 도움 없이 가야금의 울림만으로 국악의 대표적 기악곡인 <영산회상>을 두 시간 가까이 연주하는 <하늘과 땅…>은 쉽지 않은 음악이다. 그렇지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집중하며 울리는 음들과 여백에서 단순한 듯 묘한 힘이 느껴진다.
성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까지
이 음반은 김 교수가 가야금을 연주한 지 43년 만에 처음으로 내놓는 독주 음반이기도 하다. 대개 합주곡 형태인 정악에서는 가야금 독주를 잘 하지 않지만, 옛날 선비들이 혼자 서재에 앉아 잠시 책을 덮어두고 연주를 했던 정악의 원래 소리에는 더 가까이 다가간 셈이다. 김 교수는 “기록으로라도 남겨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이 아니었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녹음실에서 연주를 듣고 난 젊은 녹음기사가 혼잣말로 ‘이런 소리도 좋네’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가장 기뻤다”고 말한다.
사실 대부분의 젊은 세대에게 국악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음악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져(사실은 서양문화에 더 기울어진) 재조합된 주체라는 점을 인정하면, 국악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택해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음악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명상과 여유를 점점 더 필요로 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국악은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40년 넘게 가야금과 함께 살아왔으며 정악과 가곡의 대가인 김정자 교수 역시 국악을 재발견한 사람 중 하나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그의 꿈은 서양음악을 노래하는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고 당연히 서양 성악을 하려 했다. 스무살까지 성악가의 꿈은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야금을 연주하게 된 것은 입시에서 성악과에 떨어지고 제2지망으로 우연히 국악과에 붙었기 때문이다. 그는 1959년 설립된 서울대 국악과의 두 번째 입학생이다. 근대화 바람이 거세던 60년대, 전통이란 부끄러이 없애야 할 낡은 것이었다. 김 교수는 “국악에 대한 긍지가 없었다. 서양 음악은 대단한 것처럼 보였고, 우리나라 음악을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창피해서 가야금을 잘 들고 다니지도 못했다. 국악과에 다니면서도 부전공으로 서양 성악을 계속하며, 피아노를 차지하기 위해 아침 7시까지 학교에 나오곤 했다”고 회상한다.
우리나라 음악을 해야 한다는 거창한 깨달음보다는 서울대 국악과를 세우고 국악을 전하기 위해 애쓰던 이혜구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면서 김 교수는 서서히 국악과 가야금의 매력을 알아갔다. 조금씩 그는 ‘한국 음악이란 무엇인지, 가야금은 왜 연주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대학원에 진학해 “내가 하는 음악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져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사대부들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연주한 이성적이고 냉철한 정악을 평생 연주해보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일반 백성들이 듣던 산조나 판소리, 사물놀이 등 감정 표현이 뚜렷한 민속악과 달리, 정악은 궁중에서나 양반 사대부들이 연주하던 이성적인 음악이다. 감정 표현을 최대한 억제해 담담하고 유유하고 장대하게 흐르는 정악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들을수록 새로운 맛이 우러난다.
세상을 보는 태도와도 연결돼
김 교수가 가야금을 연구하던 60~70년대에는 이미 가야금 연주법들이 많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조선이 망하면서 일본 총독부는 궁중 장악원을 축소해 이왕직아악부라는 이름으로 바꿔버렸다. 여기에서 전통 음악의 가사나 내용, 연주법 등이 많이 바뀌었다. 다시 전쟁을 겪고 국립국악원이 세워지는 혼란의 와중에 많은 연주자들이 음악을 그만두거나 잊혀졌다. 김 교수는 1976년 젊은 대학교수들과 함께 옛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원로 연주자들을 찾아내 ‘바른 음악을 잘 가꾼다’는 뜻의 ‘정농악회’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그는 원로 연주자들로부터 잊혀졌던 정악 연주법들을 이어받았고,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정악 연주회를 열고 있다.
개인의 감정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다스리는) 태도와 연결돼 있는 정악의 정신에서 김 교수는 매력을 느꼈다. “예절과 음악은 양 수레바퀴처럼 지식인들이 모두 갖춰야 할 덕목이었는데 조선 말기에는 음악을 무시하고 예절만 숭상해 나라가 무너졌다. 조선 중기까지는 음악을 모르면 정치를 할 수 없었다. 현악기의 소리는 정신을 집중해 한음 한음 곧게 낸 뒤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게 특징인데 이는 마음을 청렴하게 하려는 선비들의 정신에 잘 맞는다.” 세종이 편찬한 <악학궤범>에는 ‘음악이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혈맥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시킨다’는 구절이 나오고, <예기> <논어> 등에서도 성인들이 모두 음악을 중요하게 말한 것에는 이런 뜻이 있다고 김 교수는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오랫동안 서양 성악을 배운 뒤, 다시 가야금의 대가가 된 그는 국악의 매력으로 미묘한 아름다움을 꼽았다. “<영산회상> 첫 부분의 ‘슬기둥’ 부분을 연주할 때면 추운 겨울이 지날 무렵 저 깊이 소리는 들리지 않는 땅 속에서 생명이 움찔하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지고, 고음을 낼 때는 잡념 없이 집중해서 낸 맑은 소리가 하늘에 닿는 듯하다. 서양 음악은 구조가 복잡한데 사람은 군중 속에서 외로운 것처럼 복잡한 음악이 오히려 외롭다. 국악은 단순한 듯 미분음이 있어 미묘하고 유장하고 편안하다.”
가곡에 대한 욕심
느림의 미덕 또한 다른 음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이다. 메트로놈의 가장 느린 속도가 40인데 보통 정악의 속도는 20 정도다. 그런 느린 속도로, 몇개 안 되는 음으로 유장하게 연주를 하면서 조용히 기가 흐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가 이렇게 느린 음악을 듣느냐’고 하는데, 서양에서 연주할 때는 일부러 느린 음악을 해달라는 요청이 많다. 특히 나지막이 가장 부드럽고 작게 가곡을 연주할 때는 머리카락 하나에 몸이 매달려 진공상태에 떠 있는 것 같다. 음 하나하나가 분명하게 울리면서 공간을 끌어당겼다 서서히 물러나는 느낌이다. 빠르게 밖으로 소리만 크게 지르는 요즘 음악과는 너무 다르다.”
김 교수가 어렸을 때부터 키웠던 노래에 대한 꿈은 국악을 하면서 전통 성악곡인 가곡에 대한 욕심으로 바뀌었다. 80년대에는 가야금 연주에서 살짝 벗어나 조선권번을 세운 하규일 선생의 마지막 제자이자 양녀인 고 김진향 선생에게서 직접 노래를 배워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오는 8월19~22일에는 서울 삼청각에서 10여년 전부터 준비해온 ‘가사·가곡· 범폐 연주회’와 논문과 평론 발표회를 열 예정이다. 그는 “판소리는 그래도 꾸준한 노력으로 살아났지만 그 못지않게 좋은 가곡은 전수자가 한 손에 꼽을 정도여서 맥이 끊길 위기다. 영원히 고전이 될 만한 훌륭한 가곡을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사진/ 김정자 교수(C&L뮤직)


사진/ 조선시대 그림 속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여성들.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자리의 기생들뿐 아니라 궁중에서도 여성들이 가야금을 연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