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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곡기 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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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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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아침부터 세차게 내렸던 봄비가 점심녘이 되어도 수그러들 줄 모른다.

청와대 앞에서 열리는 1천명 촛불기도회에 가기로 했는데 걱정스럽다. 이번 촛불기도회는 반핵국민행동과 원불교가 중심이 되고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 이웃종교와 함께 ‘핵발전정책전환과 핵폐기장 추진 중단’을 염원하는 기도회이다.

지난 3월27일부터 오늘까지 33일째(4월29일 현재) 곡기를 끊고 생명과 환경, 상생을 염원하며 청와대 앞에서 힘겨운 단식을 한달이 넘게 지속하고 계신 김성근(원불교 교무) 영광핵폐기장반대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님 뵈러가는 마음이 사실 더 크다.

단식하신 지 10여일쯤에 서울 농성장에서 뵐 때만 해도 말씀도 많이 하시고 먼 길 왔노라고 차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며 보살핌을 주셨는데, 33일을 넘기는 극한의 상황에 온몸 내어놓은 교무님의 하루하루가 담긴 소식을 접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눈 붉히기 일쑤다.

삭발한 빡빡머리는 흰 머리칼이 더 많이 내려앉았고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은 얼굴을 더욱 새까맣게 만들어버린다.

영광 백수땅에서 ‘대각의 문을 연’ 원불교의 제1대 성지인 영산원불교 사무소에 발을 내디딘 지 1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영광핵발전소 반대투쟁을 놓지 않으셨던 분이 핵폐기장 추진 중단을 위해 목숨을 놓은 수행을 벌이고 계시는 터라 청와대로 향하는 마음은 무겁기 한량없다.

비가 온 덕()에 일손 놓은 농민들이 예상보다 많이 참석해 원불교 성직자와 지역 사람들을 꽉 채운 2대의 차량은 힘겹게 빗속을 헤치며 6시간여 만에 서울에 도착한다.


코앞이 청와대이고 김성근 위원장님을 금방이라도 뵐 줄 알았는데 광화문 근처 어느 작은 공원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지난해 겨울 서울 한복판에 천막을 쳐놓고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며 종교인들이 천막농성을 벌이던 ‘열린시민공원’이란다. 구로동에서 목사하는 친구가 일주일간 천막농성을 벌일 때 김성근 교무님이 함께 예배에 참여해 인사를 나눴노라고 일러주던 기억이 새롭다.

하루 종일 거세게 내리던 비는 어느새 멈추어섰고 각자의 초에 불이 하나하나 당겨진다.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전철을 반대하며 38일간 단식농성을 하고 몸을 추스르고 계시는 지율스님, 서울대에서 원자력공학을 공부하다 반핵운동을 하시는 김영락 목사님, 천주교 환경연대의 유영훈 신부님, 그리고 김성근 교무님까지 물질문명의 이기가 가져오는 생명파괴, 환경파괴를 막기 위한 일이 21세기 종교인들의 소명이라는 말로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밤이 깊어지자 사회자는 청와대를 향해 외친다. “노무현 대통령! 지금 잘 때입니까? 우리 국민이 핵을 떠메고 갈 길 몰라 이렇게 밤하늘을 헤매고 있는데 잠이 옵니까?”

건물마다 휘황한 전등과 네온사인에 휩싸인 최대 전력소비지 서울 한복판! 다시 새벽길을 되밟아 내려가야 하는 영광사람들은 미아가 되지 않으려 허둥댄다.

나랏님과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백성이라는 분노와 자괴감이 영광사람들 모습에 서려 있음을 청와대는 아는지 모르는지….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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