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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 사는 부모, 책 읽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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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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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전문가가 발달단계에 따라 고른 어린이를 위하는 책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

자식이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했다. 그래도 나는 배를 주리면서 책을 사준 적은 없다. 책이란 게 배를 주리면서까지 사주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창 지식욕에 불타던 20대 때 배를 주리면서 내 책을 사보기는 했지만 크게 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빌려봐도 그만이었을 것을 왜 그렇게 소유하려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책도 마찬가지다. 물론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가 읽을 책을 준비하기도 하고, 좋은 책이 눈에 띄면 정말 배를 주리면서까지 사다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부모들이 있다. 말을 하다 보니 좀 답답한 생각이 든다.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어서 정말 좋은 어린이책을 서가에 듬뿍 꽂아두었다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읽을 좋은 책을 듬뿍 갖춰놓았다면 부모들은 책 욕심을 덜 내지 않을까 말길이 옆으로 샜다. 본류로 되돌아가자면 어려서부터 그림책을 많이 읽은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부모가 너무 많은 책을 사주어 읽기를 강요하면 오히려 책과 점점 더 멀어지는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책 읽는 재미가 얼마인데!

어린이 책 고르기, 실패율 낮추는 비법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할 것인가? 답은 너무 분명하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준비해주어야 한다. 그래, 말은 쉽다. 다만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주변의 여러 사례나 아동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보면, 아이의 발달단계에 근거해 책을 고르면 그나마 실패할 확률이 낮다.


인간의 발달에 관해 여러 방면에서 연구해온 교육학자들은 아이의 발달영역을 신체적 발달, 기질 발달, 인지 발달, 사회적·정서적 발달, 정신적 성 발달, 도덕 발달로 나누었다. 아이들은 각 발달단계에 따라 어떤 특별한 것에 매료되는데, 그에 맞추어 책을 고르면 상당히 유용하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발달단계에 따른 것이더라도 잘 만든 책이 아니면 아이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차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출간된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아이들의 마음을 차지해온 책, 발달단계 이론이니 뭐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보면 깔깔깔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책장 위에 엎어질 책들만 몇권 골라보았다.

0살에서 18개월:

감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시기다. 이 시기의 인지발달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람이나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에 계속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 아이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반복적으로 인식시켜주는 까꿍놀이를 무척 좋아한다. <열두띠 동물 까꿍놀이>(보림), <달님 안녕>(한림) 같은 책을 보고 싫어하는 아이를 별로 못 보았다. 두 책 다 아이들이 물고 빨 수 있을 정도로 책 크기가 작고 낱장이 두꺼워 더욱 좋다.

18개월에서 36개월:

아이들은 사물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지만 자기 중심적이다. 또한 숫자·색·종류 등을 알기 시작하고 빠르게 말을 배우며 대소변을 가리고, 몸의 각 부분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자율성이 생기면서 고집도 세어져 어른들을 애먹인다.

<잘 자요, 달님>(시공주니어)은 잠들기 전 방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인사하는 책인데, 자신이 잠들면 다 잠든다는 식의 아이다운 자기 중심성을 잘 살려낸 책이다. <기차 ㄱㄴㄷ>(비룡소)은 소리와 색의 종류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준다. 제발 부탁드리건대 이 책으로 아이에게 ‘ㄱ ㄴ ㄷ’ 하면서 글자를 가르치지 마시라! 그래서 아이로 하여금 책을 부담스럽게 느끼게 할 요량이면 아예 이 유쾌한 책을 고르지 않는 게 아이를 더 행복하게 할 것이다. <사과가 쿵>(보림)은 아주 커다란 사과를 먹는 작고 큰 동물들의 모습·소리·표정이 다채롭게 표현된 책이다. 동물의 수를 세고 크기를 비교하고 각 동물이 사과 먹는 소리를 흉내내거나 비교하는 재미가 각별하다. 게다가 다 먹은 사과와 동물들이 마지막에 펼치는 멋진 뒤집기는 아이들이 바닥에 뒤집어져 웃게 한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사계절), <우리 몸의 구멍>(돌베개어린이)같이 배변이나 인체에 관한 책도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재미있어 하며 읽는다. <그래도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중앙출판사)와 <안 돼, 데이빗!>은 고집이 세져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는 아이가 마음을 다치지 않고 부모와 건강한 애착을 이루도록 도울 책이다.

36개월에서 만 6살:

이 시기 아이들은 친구들과 잘 놀고 남녀 역할이나 부모 역할, 사회적 전통을 배우기 시작한다. 가장 큰 특징은 상상력이 발달한다는 것인데, 일생에서 가장 상상력이 발달하는 시기다. 단지 즐거운 책뿐 아니라 아주 슬픈 책도 재미있어 하면서 읽을 나이다.

<엄마가 알을 낳았대!>(보림)는 출산과 생명에 관하여, <슈렉!>(비룡소)은 남녀 역할이나 진실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짖어 봐 조지야>(보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루면서 포복절도하게 하는 책이다.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국민서관)는 아이들의 나쁜 버릇이나 고집을 유쾌한 상상력으로 일거에 부숴버린다. <악어도 깜짝, 치과 의사도 깜짝!>(비룡소)은 병원에 대한 두려운 상상을 없애준다. 엉뚱한 생각이나 잘못된 해석으로 야단맞은 경험이 있는 아이라면 <트레버가 벽장을 치웠어요>(비룡소)를 읽으며 주인공 트레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웃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것이다. <곰 사냥을 떠나자>(시공주니어)는 아이들이 상상만으로 얼마나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보여주는데, 말놀이의 재미 또한 녹록지 않다. <마들렌카의 개>(베틀북)는 성격이 좀 차분한 아이라면 누구나 푹 빠져들어 한동안 들고 다닐 책이다.

만 6살 이후: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더라도 재미있는 그림책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자. 책을 읽고 머릿속에 저장했다가 어른이 물으면 지식을 쏟아내도록 강요하지 말고 제 마음이 푸근해지도록 빠져들 책들, 사랑스러운 책들을 아이 곁에 계속 남겨두는 것도 아이가 책을 좋아하도록 돕는 방법이다. <강아지똥>(길벗어린이), <지각대장 존>(비룡소), <여우를 위한 불꽃놀이>(풀빛), <미술관에 간 윌리>(웅진), <학교 안 갈 거야>(베틀북) 같은 책을 읽으며 부모와 더불어 울기도 하고 깔깔거리기도 한 아이라면 장차 어떤 책을 만나든 책을 싫어하기가 쉽지 않을 게다.

공혜조/ 월간 <열린어린이> 편집인 www.openkid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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