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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권미형·공상아] 미스 김, 널 보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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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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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날 보러와요>의 ‘원조 미스 김’ 오지혜, 새로 뜨는 ‘미스 김’ 권미형·공상아를 만나다

1980년대에 전국을 공포에 떨게 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과 그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동시에 개봉돼 화제다. 연극 <날 보러와요>(김광림 작·연출)와 영화 <살인의 추억>(봉준호 각본·감독)이 그것이다. 송강호·김상경 주연의 영화도 가히 완벽한 관극의 즐거움을 느꼈을 정도로 훌륭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인 연극 <날 보러와요> 또한 원작이 갖는 아우라는 둘째치고라도 연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들로 가득 찬 수준작이다. 그리고 난 이 연극이 초연되던 97년에 출연하기도 해서 이 작품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내가 그때 맡은 역할은 화성 촌동네의 다방 아가씨 ‘미스 김’이었다. 영화에서는 이 캐릭터가 빠져 있지만 연극에선 ‘진실의 부재’라는 주제를 무색케 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끔찍한 살인사건이 계속되고 범인은 오리무중이지만 그래도 삶은 살 만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하는 따뜻한 역할이었다.

그들은 참 행복하다

사진/ 이용호 기자
그 당시 <날 보러와요> 공연은 흥행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연극계에 좋은 작품이라고 입소문이 났다. 제작을 한 극단 연우무대쪽에선 공연 끝나고 슈퍼마켓을 차릴 계획이라는 농담까지 할 정도로 분장실 벽은 연극인들이 입장료 대신 들고 온 음료수 박스들로 가득했을 정도다.


얼마 전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날 보러와요> 연습실을 찾았다. 반은 새 멤버들이지만 그래도 다시 뭉친 ‘어제의 용사들’을 응원하기 위해서였고, 무엇보다 또 다른 ‘미스 김’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연습실 풍경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약간 어두운 조명, 퀴퀴한 지하실 냄새, 담배꽁초가 쌓여 있는 재떨이들, 가족 같이 스스럼없는 관계들이지만 묘하게 뿜어져나오는 적당한 긴장들…. 잠깐 잊고 있었지만 내가 너무나 사랑한 분위기였다. ‘원조 미스 김’의 방문으로 작은 인사들이 오간 뒤 시작된 연습. 미스 김 장면만 나오면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6년 전, 문성근 선배가 어떤 공연리뷰에 “미스 김을 연기한 오지혜가 예쁘다”라고 쓴 게 생각났다. 역할도 예쁘고 연기도 예쁘단 뜻이었으리라.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 눈앞에서 또 다른 미스 김을 연기하고 있는 신인 여배우들인 권미형·공상아, 두 친구 역시 참 예쁘다는 사실이었다. 싱그러운 자극을 맘에 안은 채 돌아왔고 며칠 뒤 난 두 신인 여배우를 대학로에서 다시 만났다.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딴따라를 만난 건 처음인지라 왜 연극을 하게 됐는지부터 물었다. 권미형은 11년 전 <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뿅’ 가서 연극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멋있게 보였지만 너무나도 평범한 공무원 집안에서 자란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러시아어과를 택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보니 4년 내내 연극 동아리에만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제서야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선배들의 충고를 밑천 삼아 서울예전엘 들어갔다. 그는 자기 이름만으로 관객을 부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에둘러 배우의 길을 걸어온 사람답게 수줍게 말을 이어갔다. 그에 비해 아직 학생인 공상아는 조곤조곤 하는 말에 야물딱스러운 면이 있다. 공상아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연예인을 꿈꾸다 안양예고를 거쳐 지금은 연극원에 재학 중이고 반전활동 같은 데 앞장서는 지적인 배우가 되고 싶단다.

가정환경이나 배우가 된 동기, 거쳐온 학교들이 모두 다른 만큼 그들은 각자 다른 ‘미스 김’을 연기하지만, 유일하게 공통된 대답은 지금 그들은 참 행복하다는 거였다. 그들도 예전의 나처럼 연극이란 아편에 중독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많이 알아주지도 않고 돈도 많이 안 주고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저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없지 않는가.

똑같은 연극, 두 가지 느낌

사진/ 〈날 보러와요〉에서 ‘미스 김’역할을 맡은 권미형·공상아씨(왼쪽부터). 권씨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눌하고 순박했고, 공씨는 어리지만 또랑또랑했다.(이용호 기자)
그들은 같은 작품 안에 같은 역할, 같은 대사를 하는데도 상당히 다른 ‘미스 김’을 보여준다. 권미형이 연기하는 미스 김은 조금 어눌하고 순박한 미스 김이고, 공상아가 연기하는 미스 김은 나름대로 잔머리도 굴리고 새침을 떠는(그러나 남이 보기엔 역시 순박한) 미스 김이다. 재미있는 건 둘을 실제로 만났을 때도 같은 신인 여배우지만 권미형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눌하고 순박했고, 공상아는 어리지만 또랑또랑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연극 <날 보러와요>를 권미형이 미스 김일 때와 공상아가 미스 김일 때 두번을 보게 된다면 똑같은 작품인데도 아주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들과 만나고 있으면서 난 연기를 하는 데서 ‘다른’ 연기는 있어도 ‘틀린’ 연기는 없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난 배우의 변신을 믿지 않는다. 만약 배우의 생명이 변신에만 있다면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미스 김을 하루 걸러 교대로 연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똑같아야 한다. 6년 전의 나도 마찬가지고. 하나 오지혜의 미스 김, 권미형의 미스 김, 공상아의 미스 김은 같으나 다 다르다. 배우 개인이 그 역할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한 것은 필요 없고 그저 그 작품 안의 극중 인물만 필요하다면 관객들은 힘들여 극장까지 발걸음할 것 없이 집에서 보고자 하는 작품의 스토리만 읽어도 무방하다. 연극은 그런 거다. ‘미스 김’을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배우 누구누구가 연기하는’ 미스 김을 만나러 오는 것이다.

물론 극중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인물을 고민하고 분석하는 과정이야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간접경험과 상상에 의해 연기된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숨쉬고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고 관객에게 침을 튀기며 존재하는 것은 분명 자연인 배우이므로 결국 그 배우의 개인사와 가치관, 그의 영혼 안에서 모든 게 나오기 때문이다.

난 그들의 전작을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리라 짐작할 수도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은 맑은 영혼을 가졌을 거라는 거다. 이 미스 김은 맑은 영혼을 가져야지만 해낼 수 있는 역할이다. (나도 한땐 참 착했다. 지금은…) 그런 역할이 어디 있느냐고 의심이 가는 독자들은 이번 <날 보러와요>와 <살인의 추억>을 다 보고 비교분석해보기 바란다. 영화는 비관적인 데 반해 같은 사건을 다루는 연극은 그래도 희망적이다. 그 기준은 바로 영화에는 없는 캐릭터인 이 ‘미스 김’ 때문이다. 진실이 실종되고 혼란의 극치 속에 방황하는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확실한 진실’을 갖고 있는 인물이 이 미스 김이며, 그 진실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유일한 헌법인 사랑을 진실되게 보여주는 권미형·공상아가 난 참 예쁘다.

영화배우 오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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