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여백을 간직한 문화적 공간으로 탈바꿈…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거리에서 여유로움 만끽
서울의 고층빌딩 숲 뒤에 ‘이상한 나라’가 있다.
자동차로 가득한 왕복 12차선 광화문 세종로 옆에 외롭게 서 있는 동십자각을 끼고 살짝 돌아서면 만나는 삼청동길. 추억의 데이트 코스나 수제비집 등으로만 알려졌던 이곳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대형 화랑들과 유명 음식점들 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변화를 알아채려면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새로운 모습은 골목골목 사이에서 조용하게 나타나고 있으니까.
느림의 미덕을 즐기고 싶지 않은가
동십자각부터 시작해 총리공관을 지나 삼청공원까지 이어지는 삼청동길은 행정구역상으로는 7개의 동을 포함하지만 그냥 삼청동길로 불린다. 경복궁 담 맞은편 사간동과 소격동의 국제·금호·현대갤러리, 학고재로 이어지는 길은 가장 화려하고 잘 알려졌다. 그 뒤쪽에 숨어 있는, 국군기무사령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아트선재센터 주변과 총리공관 주변의 화동·삼청동·팔판동·송현동 등은 최근까지도 1960~70년대의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 곳이다. 변화는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여기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서울의 일상과는 다른 고즈넉한 느낌이 있다. 도시의 옛 모습이 남아 있고, 건물도 나지막하고, 거리는 예쁘고, 사람도 붐비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의상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와 10개월 전 화동 골목에 ‘램’(lamb)이라는 옷가게를 연 허유(29)씨는 삼청동길을 이렇게 예찬한다. 조그만 집 1층의 동네 피아노 학원을 개조한 작은 가게에서 허유씨가 디자인을 하고 간호사 출신의 솜씨 좋은 어머니와 함께 일일이 손으로 직접 만든 여성 옷을 주로 판다. 둘이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만큼만 만든다.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에 휩쓸리지 않는 이 작업에 대해 두 사람은 “궁상을 많이 떤다”고 표현한다. 허씨는 “이 거리의 분위기가 좋아서 가게를 냈고 손님들도 혼자서 길을 거닐다 ‘여기 이런 가게가 있네’ 하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장사와 손님이 서로 취향이 맞는 셈”이라고 했다. 삼청동길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런 여유와 낯섦이다. 대도시의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다른 세상에 놀러온 여행자처럼 변신시키는 것이다.
눈부신 봄날 찾아간 삼청동길 골목엔 이렇게 소박한 가게가 숨어 있었고, 작고 실험적인 갤러리나 공방, 허름한 듯 개성 있는 카페나 음식점들이 새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작가 야요이 쿠사마의 설치미술전이나 허우샤오시엔 영화제에는 평일인데도 관객들이 몰린다. 적어도 이 거리에서는 ‘예술적’이라는 수식어가 흥행에 부담스러운 낙인이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삼청동만의 특별한 무엇인가를 찾아온다. 이미 너무 화려해지고 복잡해진 인사동이나 청담동, 홍익대 앞이나 대학로와는 다른 나만의 것을 좇아 보물찾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삼청동길은 우아하게 ‘떴다’.
소박한 가게와 실험적 갤러리·공방
이 거리가 사람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은 1년 전쯤부터다. 총리공관 맞은편, 쇼윈도 너머로 알록달록한 구슬목걸이와 귀걸이가 사람들의 발길을 한참 붙잡아놓는 액세서리 가게 ‘주스’를 경영하는 윤영주씨는 지난해 2월 초 이 가게를 열 때만 해도 거리는 한산했다. “친구들이 걱정을 많이 했고, 집주인 아주머니도 ‘액세서리 장사를 하려면 대학가 앞에서 해야지 왜 여기서 하느냐’고 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일요일날 장사하는 가게가 이 골목에선 우리밖에 없었다.” 윤씨는 “요즘은 찾아오는 사람이 점점 늘어 이 거리가 변한 것을 실감한다. 이 거리를 좋아해서 계속 지나다니다가 궁금해서 벼르고 별러 들렀다는 손님도 많다”고 했다. 손님 중엔 데이트하는 남녀, 동창끼리 밥 먹고 갤러리 구경한 뒤 산책하던 40대 아주머니들이 많지만, 요즘에는 10~20대도 늘고 있다. 주스 가까이에 있는 인도풍 옷가게 달광선, 프랑스에서 모자 디자인을 공부한 천순임씨가 특이한 모자들을 만들어 파는 루이엘 등도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젊은이들의 등장은 유명했던 이곳 먹자골목의 풍경도 바꿔놓았다. 수제비와 단팥죽, 한정식에 더해 이탈리아 요리를 먹을 수 있는 ‘뺑&빵’과 ‘수와래’, 국제갤러리가 운영하는 ‘더 레스토랑’, 퓨전 일식집 ‘라마마’, 빵가게 ‘아루’, ‘카페 37번지’ 등이 나타났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서울 셀렉션’은 이 거리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삼청동길이 시작되는 길목, 출판문화회관 지하의 이 자리에는 20년 전 꽤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어 지금의 40~50대들이 ‘칼질하던’ 고급 데이트 코스였다. 그 뒤 가수 전인권씨가 운영하는 카페가 생겼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뒤 망해서 3~4년 동안 창고로 방치돼 있던 것을 지난해 3월 한 언론사 문화담당 기자였던 김형근씨와 부인 양미순씨가 고쳐 ‘서울 셀렉션’ 문을 열었다. 다양한 한국 관련 영문 서적과 영화 DVD, 음반 등이 전시돼 있는 이곳은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한 문화공간이다. 문화정보와 한국 소식을 알리는 사이트(seoulselection.com)도 운영하고, 주변의 금호갤러리를 빌려 주말에 외국인 대상 영화도 상영한다. 삼청동길 가까이에는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고궁들과 한옥 마을이 있어 외국인들이 많이 모인다. 양미순 이사는 “삼청동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작년부터 새로운 가게들이 많이 생겼다. 새로운 가게가 거짓말 안 하고 1주일에 한곳씩 생긴다. 한옥마다 개조해서 가게로 고치고 있는데 조그만 액세서리 가게, 앤틱 가게, 식당이나 카페가 많다. 인사동의 고유한 맛과 멋이 죽고 싸구려화되면서 인사동이 이곳으로 옮겨오는 것 같다”고 했다.
삼청동길이 관심을 끌게 된 직접적 계기는 2001년 인사동길 정비 뒤 작은 가게들이 사라지고 번듯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그 분위기에 질린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다. 북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문화공간으로서 삼청동길을 다시 보게 했다. 또 2002년 봄 종로경찰서와 안국빌딩 사이의 육교가 철거되면서 인사동에서 아트선재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는 것도 문화애호가들이 모여드는 지름길이 됐다.
인사동 느낌 간직… 상업적 문화 탈피
아트선재센터 맞은편 모퉁이에서 ‘소담공방’을 열고 있는 이양순씨도 2년 전 인사동에 가게를 열려다가 이곳으로 왔다. “인사동이 너무 번잡해지고 분위기도 안 좋아졌다. 임대료가 너무 오르니까 손작업을 하던 가게는 많이 없어지고 수지를 맞추기 위해 중국산 물건들을 파는 대형 빌딩들만 생겼다.” 지금의 작은 가게에서 이씨는 수를 놓고 남편 김재영씨는 바로 옆에서 나무를 깎아 둥그런 얼굴이 정겨운 조각들을 만든다. 이씨는 “자기만의 것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손으로 하나하나 직접 만든 작품들을 사러 오는 손님들이 많다. 청담동·압구정동 등 강남에서 온 생활이 안정된 40~50대 여성들이 단골이고 외국인 손님들도 많다”고 말했다. 이 근처에는 최근 이런 공방들이 여럿 생겼고, 명청가구 전시장, 고호, 락, 앤티크, 구색 등 골동품 가게들도 잇따라 문을 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빈 건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2001년 개관한 티베트 박물관의 심광웅 홍보실장은 “자연스럽고 난잡하지 않고 상업화되지 않은 문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삼청동을 찾아온다”며 “강남이 가질 수 없는 궁궐과 한옥이 있으면서 실험적인 갤러리들도 있는 삼청동은 옛것과 자연스러움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문화공간”이라고 분석한다. 30년 넘게 골동품을 모아온 신영수 관장이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처음 이 박물관을 열었을 때는 하루 관람객이 많아야 30명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지금은 주말에 하루 100명 이상이 온다. 신 관장은 이 주변에 올해 안에 두개의 박물관을 새로 문 열 계획이다. 이 지역의 잠재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심 실장은 “스스로 문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삼청동에 와서 갤러리 구경하고 카페에 가고 걷는 것을 문화인의 어떤 품위라고 생각한다. 특정한 행사를 보러오는 게 아니라 이 거리의 분위기가 좋아서 오는 것, 강남 등에는 없는 이곳의 문화적인 것을 보러 오는 것이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랫동안 미관지구로 묶여 남아 있는 낡은 단층집이나 2층집이 그대로고, 검은 바탕에 흰 페인트로 쓴 ‘쌀집’ 간판 같은 옛 풍경도 남아 있다. 다른 곳에서는 불도저에 사정없이 허물어져버린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가 이 길의 매력이다. 그래서인지 가게를 내는 사람들도 굳이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지 않고 이 낡음을 응용한다.
갤러리 한쪽에 작은 부엌 겸 카페테리아가 있는 ‘갤러리 빔(biim)’은 오래되고 조그만 집 두채를 그대로 터서 만들었다. 이곳에서 화가인 최지현씨는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만들고, 비디오 예술가이며 사진작가인 남편 조수연씨는 스테이크를 굽는다. 전시만 보는 기존의 딱딱한 갤러리와 달리 음식을 먹으며 여유롭게 수사를 떨고 친한 사람들끼리 작은 파티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최씨는 “인테리어 하는 분은 다 뜯고 새로 짓자고 했지만 골목의 공간이 너무 좋아서 옛날 집을 그대로 살렸다. 반듯하지 않은 삼각형 공간도 그 나름의 전시공간이 됐다. 한번 오면 이사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동네분들이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아늑한 분위기도 좋다”고 설명한다. 젊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둥지를 마련하는 것은 강남이나 인사동 홍대 앞보다 싼 임대료 때문이기도 하다. 뉴욕에서 공부한 최씨는 “싼 집값 때문에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공장지대에 가난한 작가들이 모이면서 예술적인 동네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여유로운 삶의 흔적을 찾아서…
기존의 유명 화랑들 외에 빔처럼 음식점이나 아트숍을 겸하면서 유명하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들이 최근 생겨나고 있는 것도 새로운 흐름이다.
총리공관 조금 못미쳐 있는 ‘팩토리’는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만든 액세서리를 팔기도 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들을 발굴해서 한달에 한 차례씩 새로운 전시회를 개최한다. 큐레이터 곽현정씨는 “홍대 앞에도 대안공간이 있지만 여기는 덜 비싸고 덜 복잡하다. 강남의 너무 세련되고 깨끗한 분위기와는 달리 기와집들이 남아 있는 분위기도 좋다. 유행에 약간 둔감하면서 여유로운 것이 이 거리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점점 더 빨라지고 복잡해지고 화려해지고 획일화되는 바깥 세상에 지쳐가는 사람들이 늘수록 과거의 여유로운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이곳으로 도망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 같다. 바깥 세상의 격랑에 저항하며 이 섬이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사진/ 삼청동의 낮. 액세서리 가게 쇼윈도 너머로 오래된 단층집들이 보인다. 과거와 현재의 아늑한 공존은 삼청동만의 매력이다.

사진/ 삼청동의 밤. 유흥업소가 없는 서울의 드문 풍경. 짙은 어둠에 쌓인 거리에서 불빛을 받으며 진열된 한복이 강렬하다.

사진/ 삼청동 길에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평일 오후 국제갤러리와 서울 셀렉션을 찾은 외국인들, 액세서리·옷 가게 주스(왼쪽부터).

사진/ 모자가게 루이엘은 개성있는 모자를 원하는 여성들이 즐겨 찾는다. 대량생산보다는 손으로 만든 독특한 물건이 삼청동 길 가게들의 특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