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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비극 뒤에도 웃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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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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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살인의 추억>과 <날 보러와요> 원작자 김광림 교수

사진/ 류우종 기자
“영화가 정말 좋았다. 봉준호 감독이 매우 치열하고 재주가 많다. 근래 본 우리 영화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높았다. ”

김광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는 자신의 원작을 영화로 새롭게 빚어낸 젊은 감독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살인의 추억>과 <날 보러와요>의 ‘어머니’ 격인 김 교수는 그러나 “연극은 영화보다 많은 부분을 생략해 생각의 여지가 많고 주제에 집중하는 재미가 있다”며 서울 성북동의 지하 연습실에서 배우들과 공연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같은 원작에서 싹튼 영화와 연극의 ‘경쟁’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운 긴장을 주고 있었다.

김 교수는 <날 보러와요>를, 한 배우의 얼굴을 보며 떠오른 우연한 생각에서 쓰게 됐다. “화성사건에서는 엉성한 수사 시스템에서 억울하게 고생한 많은 용의자들이 있을 텐데 상징적으로 연극에서 한 배우가 여러 용의자 역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났다. 결국 범인을 못 잡았는데 수사극에서 범인이 진실을 상징한다면 진실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죽은 사람이 있으니 범인은, 진실은 있지만 찾을 수 없다, 찾아도 알 수 없다는 철학적 명제를 떠올렸다.”

그가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를 시작한 1994년에는 아직도 화성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있었다. 아무래도 범인을 못 잡자 범인이 우주·화성에서 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만큼 막막한 때였다. “마지막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실제에도 있었는데, 디옥시리보핵산(DNA) 검사에서 범인이 아닌 걸로 나오자 형사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취재하러 화성경찰서에 갔다가 그때 충격으로 중풍에 걸려 형사 생활을 그만두고 계속 경찰서 주변을 맴도는 사람도 만났다.” 김 교수는 박 형사와 김 반장의 모델이 된 두 형사를 찾아갔다(엘리트 형사는 가공의 인물이다). 처음 그를 경계하던 형사들은 여러 번 찾아간 김 교수에게 마음을 열고 많은 이야기를 해줬으며 인간적으로 친해졌다. “첫 공연 때 두 형사가 보러 왔고, 자신들의 애환을 잘 표현해줬다며 공연이 끝난 뒤 배우들에게 술을 샀다.”

작품을 쓰면서 김 교수는 “굉장한 공포 속에 있었다. 특히 범인이 13살 소녀를 살해하는 장면의 긴 대사는 범인의 심리상태로 들어가야만 쓸 수 있었는데, 살인을 하면서 연쇄살인범이 느끼는 희열에 나 자신도 빠질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공포스러웠다. 공포의 심연 같은 데 빠지는 느낌이었다.”


1996년 첫 공연 때 누군가 사간 판권은 우여곡절 끝에 봉준호 감독에게 돌아갔다. “봉준호 감독이 처음에 찾아와서 2시간 넘게 얘기를 했는데 믿음이 갔다. 똑똑하고 좋았다. 이미 여러 번 연극을 보고 대본도 완전히 분석이 돼 자기 안에서 소화한 상태였다. 피상적이지 않았다.”

김 교수가 보기에 영화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야매(무허가 진료) 주사를 놔주는 애인이 힘들어하는 박 형사를 들판으로 불러내 링거를 놔주는 장면의 느낌과 엘리트 서 형사가 엄청난 사건 앞에서 과학적 수사에 회의를 품고 광기를 띠어가는 변화를 세심하게 담아낸 점”이다.

영화와 연극의 가장 엇갈리는 지점인, 1980년대라는 시대배경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렇다. “나는 진실찾기의 어려움이라는 철학적 과제를 주제로 설정했기 때문에 시대상황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70년대 말 대학시절을 보낸 나와 달리, 20대의 봉 감독에게 8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고, 영화에서는 전두환 시대를 많이 드러냈다.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을 그려내는 층이 넓어졌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품 내적으로 80년대가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비극적 사건을 다룬 이 작품에 웃음짓게 하는 대목들이 있는 것은 의외다. 김 교수의 답은 “리얼리티에 충실할수록 비극 뒤에도 틀림없이 웃음이 있다. 예를 들면 범인은 무모증일 거라고 추정하는 대목에서 관객들이 모두 웃는데 사실은 처절한 진실이다. 증거는 안 나오지 형사들이 하도 고민을 하다가 생각해낸 게 무모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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