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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웅의 제국,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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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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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 박한제 교수의 중국 역사 기행

<삼국지>의 영웅들이 등장한 3세기부터 세계제국 당이 출현한 7세기까지 400여년의 중국 역사는 왕조의 이름들을 익히기에도 벅찰 만큼 복잡하다. 중원으로 밀려든 유목민들의 말발굽 아래 한족들의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은 무너져내렸고, 수많은 ‘오랑캐’(胡) 왕조와 ‘한(漢)족’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이 복잡한 시대에 매료돼 30년 동안 연구해온 박한제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가 3권의 두툼한 역사 기행서를 냈다. ‘박한제 교수의 중국 역사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강남의 낭만과 비극>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은 1500여년 전 역사와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30번 넘게 중국을 오간 한 학자의 땀이 밴 기록이며, 이 시기를 되도록 쉽게 설명하려는 탄탄한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가 이 시대를 이해하는 화두는 호한체제론(胡漢體制論)과 교구체제론(僑舊體制論)이라는 민족 융합론이다. 강대한 한(漢) 제국이 쇠퇴하자 제국의 내부 또는 주변에 살던 유목민들은 대거 중원으로 진출해 16개의 나라를 세웠다. 한족들과 ‘오랑캐’들은 갈등도 심했지만 점차 통합되면서 당이라는 제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고, ‘오랑캐’ 국가를 피해 남방으로 내려가 새 국가를 세운 한족들 역시 남만 등으로 불리던 토착민들과 섞여갔다. 지은이는 이 민족 융합과 다양성이 당 제국이 세계제국으로 번창하는 기본이 됐고, 오늘날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대륙국가 중국의 출발점이 됐다고 본다.

전통적 영웅상을 뒤집는 부분도 흥미롭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제갈량이 남만의 우두머리를 7번 잡고 7번 풀어줘 복속시켰다는 ‘칠종칠금’ 고사는 후대 한족 지식인들이 제갈량 영웅 만들기를 위해 소수민족을 희화화한 ‘문자의 폭력’이라고 박 교수는 해석한다. “운남은 북경에 인류가 살기 10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중원과 떨어져 평안하게 살고 있던 그곳 사람들을 외부 세력이 내버려두지 않았을 뿐이다. 제갈량의 ‘남중정벌’도 삼국시대판 부시의 대아프간 작전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랑캐에 떠밀려 강남으로 쫓겨간 한족 귀족들이 도교적 은둔에 빠진 채 한식산(마약)에 중독돼 ‘유유자적’한 것이 낭만적 ‘죽림칠현’의 본모습이라는 지적도 새롭다. 그사이 ‘오랑캐’ 선비족이 통일제국의 싹을 키웠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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