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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엽기적 살인, 게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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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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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 <살인의 추억>과 연극 <날 보러와요>의 특급 스릴러

사진/ 영화 〈살인의 추억〉은 필름의 특성을 살려 복잡한 결들을 감추고 있다. 시골뜨기 ‘구악 형사’로 분한 송강호(왼쪽)와 도시 냄새 풍기는 ‘선진’형사로 분한 김상경.
벼는 노랗게 익어가고 아이는 메뚜기 잡고 경운기가 탈탈대는 가을 농촌 들녘의 배수로에서 잔인하게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나체의 젊은 여성이 발견된다. 1986년부터 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조그만 마을 반경 2km 안에서 71살 노인부터 13살 소녀까지 10명 가량의 여성이 주검으로 발견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깊이 박혀 있는 집단적 공포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4월25일 개봉)과 연극 <날 보러와요>(5월8일부터 서울 동숭아트센터 공연)가 이 공포를, 공포와 마주한 사람들을 되돌아보며 나란히 다가온다. 두 작품 모두 김광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가 쓴 원작이 바탕인데, 96년 초연된 <날 보러와요>가 형님뻘이다. 같은 원작의 연극과 영화가 한꺼번에 공연된다는 것만으로도 화제지만, 단순한 화젯거리로 삼기에는 두 작품 모두 만만치 않다.

같은 원작의 영화와 연극 잇따라 공연


작품의 큰 줄기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태안지서 형사들의 모습이다.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형사들은 여인들의 끔찍한 주검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당황하기 시작한다. ‘무당눈깔’이라는 별명을 가진 토박이 박 형사는 직감에 의존해 마을의 남성들을 불러 ‘족치며’ 탐문수사를 시작한다. 서울에서 내려온 엘리트 서 형사(연극에서는 김 형사)는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신념으로 얄미울 정도로 꼼꼼하게 논리적인 추리를 시작하며 주도권을 잡는 듯하지만, 살인은 계속된다.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에서 180만명의 경찰이 동원되고 3천여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미 결말을 공개해버리고, 이 영화는 범인과의 두뇌게임을 벌이다 결국 범인과 숨막히는 대결을 하게 되는 번듯하고 폼나는 스릴러 수사극이기를 포기한다.

연극 <날 보러와요>는 원작자이자 연출자인 김광림 교수의 설명처럼 “진실은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찾을 수 없다. 찾는다 하더라도 알 수 없다”는 진실 찾기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춘다. 범인은 비오는 밤, 잠복기간을 거쳐 범행대상을 골랐고 범행도구는 피해자의 속옷이나 스타킹 등 소지품들이었다. 범행 뒤 다시 옷을 입히거나 얌전히 개어 시체 주변에 놓아둘 만큼 대담했고, 10번의 범행에서 증거 하나 남기지 않았다.

사진/ 연극 〈날 보러와요〉는 진실 찾기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춰 극을 이끌어 간다. 오는 5월8일 공연을 시작하는 〈날 보러와요〉연습 장면.(류우종 기자)
경찰은 부지런히 용의자들을 잡아들인다. 정신병원에서 도망치다 잡힌 정신이상자는 범행을 술술 자백하지만 증거가 없고, 두번째 용의자는 상세한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지만 꿈속에서 저질렀다고 강변한다. 모차르트 <레퀴엠> 선율이 고조되면서 모든 일들이 어지러워진다. 김 형사의 사랑 이야기를 빼면 이 작품은 많은 곁가지나 배경 설명을 털어내고, 주제를 향해 외길을 걸어간다. 96년 초연부터 김 형사와 박 형사 역을 맡아온 권해효·유연수씨의 안정된 연기도, 다른 성향의 용의자 세명을 1인3역으로 연기하는 류태호씨의 변화무쌍한 연기도 정확하고 탄탄하다.

탄탄한 연기력 돋보여… 시대의 진실 찾아

<살인의 추억>은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필름의 특성을 살려 원작보다 훨씬 복잡한 결들을 감추고 있다. 밝은 대낮의 친근한 논두렁 옆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점점 사건의 세부로 들어가면서, 80년대라는 시대, 그 어정쩡하고 어두웠던 시대를 깊숙이 끌어들인다.

어설퍼보이는 ‘구악 형사’ 박 형사(송강호)를 비롯해 영화 초반부 우왕좌왕하며 엉뚱한 용의자를 잡아들여 논 한가운데서 현장검증을 하다가 혼쭐이 나는 시골 형사들의 해프닝은 황당한 웃음까지 짓게 한다. 그러나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비에 젖은 밤 장면이 늘고 점점 더 엽기적이고 대담한 수법으로 살해되는 여성들의 주검에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면서 영화는 고조되는 분노와 슬픔, 광기를 실어낸다. 자신만만하게 논리적인 수사를 강조하며 아무도 모르게 감춰진 주검까지 찾아내던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갈수록 사건의 무게에 짓눌리며 점점 더 광기를 드러낼 때, 유력하지만 증거 없는 용의자(박해일)에 대한 분노로 총을 쏘아대며 미쳐가는 눈빛과 함께 영화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단 하나의 증거인, 목격자가 맹렬하게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죽어버리는 것은 속수무책인 채 버둥거리는 인간들을 향해 달려오는 엄청난 상황을 순간에 보여준다. 예측할 수도, 감당해낼 수도 없는 블랙홀에 빠져들며 허우적대는 인간들의 모습이 막막하다. “나는 이들의 죽음이 진실로 슬프다. 그리고 범인뿐 아니라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모든 상황까지도 분노한다. 피해자 가족들 생각을 많이 했고 시나리오를 쓸 땐 너무 힘이 들어 소주를 마시면서 쓰기도 했다”는 봉준호 감독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히 사건이 일어났던 80년대에 대해 감독은 할 말이 많다. “전국체전,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이 잇따르던 그때 연약한 여성은 어찌됐는가. 국가와 사회는 살인범과의 대결에서 결국 패하지 않았나. 외부 행사에 신경쓰다가 내부를 챙기지 못한 시대, 그것이 80년대다.” 때문에 80년대는 시위와 전경, 수류탄으로 상징되는 것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영화의 곳곳에 숨어 있다. 외국 순방에서 돌아오는 전두환 대통령을 위해 여학생들은 똑같은 한복을 입고 동원돼 태극기를 흔들어댄다. 원작에서 용의자가 방송에 신청하곤 하던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로 바뀌었다. 비가 오는 날, 사건을 막기 위해 전경 부대를 투입해달라는 형사들의 요청은 “시위 진압하느라 바쁘다”는 한마디로 묵살된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나오고, 이것은 유일한 목격자 광호가 죽고 조 형사(김뢰하)가 다리를 절단하는 어이없는 폭력의 계기가 된다.

사진/ 〈살인의 추억〉에는 80년대의 공포스러운 기억이 곳곳에 흐른다. 출연진 뒤에 전두환 대통령 액자와 태극기가 걸려 있다.
영화가 단지 80년대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농촌 마을 논 한편에 거대하고 흉물스럽게 들어선 레미콘 공장으로 상징되는 풍경은 근대를 지향하지만 목표에 안착하지 못하고 산업화에 오히려 짓눌린 듯한 표정으로 근대와 전근대가 어정쩡하게 공존하는 주변부 우리 근대의 축도로도 다가온다. 거대한 사건 앞에 초기 현장보존도 없고, 사건 해결의 마지막 열쇠인 범인의 DNA를 분석할 도구도 없어 미국에 증거를 보내야 한다. 답답해진 형사들은 무당에게서 부적을 사오고, 범인을 저주하는 허수아비를 세우고, 터럭 하나 남기지 않는 범인을 무모증으로 단정하고 마을의 목욕탕에서 잠복근무를 한다. 한복을 입고 동원되는 여고생들, 벌거벗은 주검으로 발견되는 여성들, 사건의 결정적 실마리를 발견하고도 인정받지 못하고 여전히 커피 타는 일이 주 업무인 여경의 모습도 도식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이다.

공들여 잡아낸 화면…관객의 감정 극대화

‘전원일기 스릴러’라는 제작진의 우스개처럼 배경이 된 농촌 마을의 공기와 분위기를 온전히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6개월 동안 군산·익산·부안·장성·광주·무안·함평·해남·서천·홍성·청원·횡성·오산·서울 등에서 공들여 잡아낸 화면, 송강호와 김상경의 힘이 있으나 과장되지 않은 연기, 관객의 감정을 계속 끌어올리는 치밀한 구성 등이 고루 뛰어난 영화다. 특히 폭력적인 경찰 역의 김뢰하, 야매 주사를 놔주는 여자를 맡은 전미선, 범인으로 추정되지만 체포되지 않는 마지막 용의자 역으로 여린 얼굴 뒤의 모호하고 불안한 느낌을 잘 표현한 박해일 등 조연들의 탄탄한 연기 때문에 훨씬 풍부한 결을 간직하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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