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문제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의 평화 해법… 미국의 탈개입 통한 비핵화·중립화 방안 제시
이라크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다. 바그다드를 점령한 미군이 후세인 동상을 끌어내리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 뒤 무거운 마음으로 <셀리그 해리슨의 코리안 엔드게임>을 펼쳤다. 만 76살인 미국 언론인 셀리그 해리슨이 쓴 <…코리안 엔드게임>을 읽다 문득 만 32살인 러시아 출신 박노자(러시아 이름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교수가 생각났다.
40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박노자와 셀리그 해리슨의 공통점은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과 날카로운 분석이다. 귀화한 박노자 교수가 한국 사회를 꿰뚫어보는 글로써 사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면, 해리슨은 <코리안 엔드게임>에서 한반도의 현실을 국제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구체적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미시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35년 동안의 한반도 취재·연구 총결산
우리는 한반도 상황을 다룬 외국 언론의 기사를 꽤 권위 있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모든 외신기자들이 한반도 문제에 정통하지는 않다. 1년 전 통일부에 출입할 때 보니 공보관실에 외신 전담 공무원이 있었다. 그는 남북관계 현안이 있을 때면 외신기자들에게 정부 입장을 설명한다. 그는 “꽤 유명한 외신 중에도 한국 현실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기자들이 있다. 이를테면 남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린다고 설명했더니, ‘판문점이 어디냐’고 되묻는 기자가 있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때는 한참 남북정상회담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더니 ‘그럼 이전에는 남북 정상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느냐’고 질문하는 기자도 있었다. 심지어 남북한이 50년 전에 전쟁을 벌인 사실을 잘 모르는 기자도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렇듯 외신기자 중에는 한반도 문제에 관심도 애정도 없거나, 일부는 관심은 있지만 애정 대신 악의가 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실에서 ‘기자’ 셀리그 해리슨이 가진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돋보일 수밖에 없다. 그는 <코리안 엔드게임>의 ‘한국의 독자들에게’를 통해 “1945년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역할에 대해 깊은 유감을 갖고 있는 미국인으로서, 현재 남과 북이 자신들의 주도로 통일이란 궁극적 역사적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해리슨은 67년 취재차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한반도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는 68년부터 72년까지 <워싱턴포스트> 동북아시아 지국장으로 일했으며, 72년에는 미국 언론인으로는 한국전쟁 뒤 처음으로 북한에 들어갔다. 그는 이 때 김일성 주석을 처음 만났고 2001년 6월까지 모두 일곱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이런 경력 때문인지 미국과 한국의 보수세력은 그를 ‘친북인사’라고 낙인찍기도 하나, 그는 북한에 대한 현실적 인식과 접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코리안 엔드게임>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경제 자유화 조처가 대규모 부패와 불균형을 발생시켰을 뿐 북한 주민들한테 경제개혁의 이득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고 설명하고 한반도 통일이 남한 주도로 이루어질 것이란 일반적 전망도 부인하지 않는다.
<코리안 엔드게임>은 해리슨의 35년에 걸친 한반도 취재와 연구활동의 총결산이다. 그는 남북과 미국을 오가며 취재하고 수집한 25상자 분량의 자료를 지난 3년동안 꼼꼼히 정리해 이 책에 담았다. 그동안 해리슨이 만난 김대중·임동원·김일성·황장엽·지미 카터·강석주·갈루치 등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핵심인사들의 생생한 증언이 실려 있다. <코리안 엔드게임>에는 기자 출신이 쓴 글답게 94년 북한 핵협상 등 구체적 상황이 신문기사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해리슨은 이 책에서 ‘북한체제는 극심한 경제난에도 왜 붕괴하지 않는가’, ‘왜 북한은 핵 개발을 하는가’, ‘주한미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등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쉬운 책은 아니다. 580쪽이 넘는 분량인데다 북한 핵과 미사일, 주한미군과 한-미 동맹, 군축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일 관계 등 복잡다단한 한반도 현안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하고 있다. 중간중간 밑줄을 치거나 되새김질하며 읽어야 할 부분이 꽤 있다.
해리슨의 일관된 주장은 미국과 북한이 진지하게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21장이 ‘미국의 정책을 위한 가이드라인’인 것에서 알 수 있듯, 해리슨의 <코리안 엔드게임>은 기본적으로 미국 언론인이 자기 나라 정부와 독자를 상대로 쓴 책이다. 때문에 책 제목에도 서양의 체스게임에서 나온 ‘엔드게임’(마지막 몇수를 앞둔 단계)이 들어가 있어 장기나 바둑을 두는 한국 독자들에겐 제목의 의미가 바로 와닿지 않는다.
그는 한반도 통일의 과정이 연방 또는 국가연합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며, 한반도 안정과 안보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평화로우면서도 점진적인 미국의 탈개입 과정을 제시한다.
남북한과 미국을 동시에 살핀 탁월한 안목
그가 제시한 방법은 우선 북-미 대화를 적극적으로 해야 하며,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병행해 남북한은 군비 통제 협상에 착수하고 미국은 남북한 군비감축에 맞춰 주한미군을 점진적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한다. 해리슨은 미국이 성공적인 탈개입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는 것을 전략적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그 결과로 탄생할 비핵화·중립화한 한반도가 미국의 이해에 절대적으로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변 미·중·일·러가 한반도 비핵화·중립화를 보장하는 안전장치를 갖추면 한반도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소된 것으로 본다.
한국 사람 중에는 미군 주둔이 남북관계의 현실과 맞지 않는 민족의 분열로 작용한다는 해리슨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가 강조한 한반도 비핵화·중립화 방안이 현실성 있는 대안이냐는 반론도 나옴직하다.
하지만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세 당사자인 남북한과 미국을 동시에 보고 판단할 수 있었던 해리슨의 ‘혜안’은 한반도 평화정착의 밑거름임에 틀림없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사진/ 셀리그 해리슨은 북미협상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협정을 타결했다.

책/ 〈셀리그 해리슨의 코리안 엔드게임〉셀리그 해리슨 지음, 이홍동 외 옮김, 삼인 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