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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가 미술의 소통을 막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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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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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계에 짱돌을 던지는 무대뽀 평론가 류병학씨가 제안하는 미술시장의 생존 전략

사진/ ‘벤처 비평가’ 류병학씨는 독일에 거주하면서 국내 미술계에 입바른 ‘참견’을 아끼지 않아 왔다.(김진수 기자)
어디서든 돈키호테는 피곤하다. 휘두른 칼날에 의도하지 않은 누군가가 비명을 지른다. 맥락 없는 싸움꾼이라는 오해도 받는다. 등 두들겨주던 이들이 어느새 물러나 뒤돌아서기도 한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있기에 사람들은 세상에 비판의 사각지대가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무모함 뒤에는 진심어린 용기가 있었음을.

류병학(43). 그는 돈키호테로 살기 위해 국내 미술계에 둥지를 틀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뿌리를 묻고 있는 그는 ‘전업주부’로 살며 책을 읽고 글쓰는 게 주요 일과다. 그럼에도 그는 인터넷으로 일간지를 샅샅이 훑고 작가들에 대한 최신 정보를 꾸준히 챙긴다. 서재엔 일간지 기사들을 기자 이름별로 스크랩해놓았을 정도다. 수만리 떨어진 이국에서도 국내 미술계 지형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는 정보력을 바탕으로, 누가 뭐래도 할 말은 한다는 배짱을 얹어 그는 종횡무진 미술판을 달려왔다.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거목’인 서세옥, 이우환, 박서보를 겁없이 도마에 올려놓고선, 이들이 서로 ‘선구자’ 콤플렉스에 빠져 작품 연대를 앞당기는 해프닝을 벌인 것을 밝혀냈다. 액자라는 틀로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을 짚어보는 ‘그림보다 액자가 더 좋다’와 같은 굵직한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독일에 둥지 틀고 온라인서 종횡무진


사진/ 무크지 <무대뽀>(아침미디어 펴냄)는 최근 3년간 미술잡지를 둘러싸고 온라인 게시판에서 펼쳐진 논쟁을 묶었다.
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 사이버 토론꾼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늪처럼 조용하게 괴어 있는 한국 미술계에 줄기차게 ‘짱돌’을 던져온 그가 이번엔 <무대뽀>라는 책을 들고 나타났다. ‘한국미술잡지의 색깔논쟁’이란 부제가 자못 선정적이다.

“미술판의 김어준이라고요 영광이죠.” 바로 곁에서 ‘씨부리는 듯’ 거친 입말 문체, 치기어리면서도 통렬한 비판, 친소관계 상관없이 눈치 안 보며 ‘씹는’ 열혈 정신…. 그런 점에서 그의 글쓰기는 <딴지일보>와 비슷하다. ‘무대뽀주의’다.

<무대뽀1>은 2000~2003년 <월간미술> <미술세계> <아트 인 컬처>(옛 <아트>) 등 미술 전문지 인터넷 게시판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묶었다. 논쟁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2000년 7월 <월간미술> 편집장은 편집후기에서 “잡지에는 뚜렷한 목소리로 잡지 색깔을 분명히 하는 견해지와 알뜰살뜰 각종 정보를 소개하는 정보소식지 두 종류가 있는데 소수를 위한 잡지인 견해지는 잘못하면 정치색을 띠는 싸움꾼의 마당이 될 확률이 크고, 다수를 위한 정보지는 그야말로 최근 유행했던 무가지처럼 농담꾼들의 장터가 되기 쉽다”며 경쟁지를 은근히 겨냥했다. 두달 뒤엔 당시 창간한 지 1년도 채 안 됐던 신생지 <아트>가 포문을 열었다. <아트>는 “월간미술은 삼성문화재단이라는 한국 미술 최대의 보수권력이 뒤에 버티고 있는 잡지”라며 대선주자들의 문화 마인드를 짚어보는 ‘문화 대통령은 누구인가’라는 특집을 기획했다가 이회창 후보가 꼴찌를 하자 삼성으로부터 기사 삭제 요구가 하달돼 순위 발표를 하지 않은 사실을 들추어냈다. 그런가 하면 <미술세계>는 돈 때문에 지면을 거래하거나 원고료 없이 글을 싣는다고 공격했다. 이 와중에 류씨를 포함해 <미술세계>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던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공방을 벌였고, 결국 이 논쟁 아닌 논쟁은 미술계의 남루한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가 됐다.

류씨는 미술잡지들이 관행적으로, 주기적으로 마련하는 ‘작가 순위 매기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지난 1월 <월간미술>은 평론가 44명을 뽑아 ‘주목할 작가’들을 선정·발표했다. 그는 이런 방법이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는 전제 아래 작가 홍현숙씨의 비판을 인용해 “가요톱텐이 월간미술의 작가 선정보다 낫다”고 말한다. 왜 “1. 가요톱텐은 작품(노래)으로 선정한다. 2. 가요톱텐은 심사과정이 훨씬 더 개방적이며 참여적(ARS 방식)이다. 3. 가요톱텐은 없어졌다.”

잘못된 관행에 똥침… 일반인 참여 유도

<무대뽀>는 인터넷에 올린 여러 사람들의 글을 한데 묶었기에 짜임새가 헐렁하고 논쟁 지점도 엉성하다. 필자들의 글도 제멋대로 튄다. 그럼에도 그는 <무대뽀>를 계속할 거란다. “미술이 늘 소외받는 건 대중과의 만남을 게을리했기 때문이지요. 독자가 저자가 되는 세상에서 미술을 놓고 ‘쑥덕공론’을 펼친 걸 기록하는 건 의미 있다고 봅니다.” 류씨는 <무대뽀2>에서는 일간지에 실리는 미술기사를 해부할 계획이다. 어떤 기자가 어떤 기사를 썼는지 돋보기를 대고 꼼꼼히 들여다보겠다는 의도다. “신문기자들이 기사 잘 쓰면 일반인들도 저절로 미술에 끌리지 않겠어요 결국엔 ‘소통’이 중요한 거죠.”

지금까지 류씨가 기획한 전시들 또한 대부분 일반인들과의 접점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지난해 여름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의 ‘스톤 앤드 워터 갤러리’ 개관전인 ‘리빙 퍼니처’도 그랬다. 창고를 전시장으로 꾸민 갤러리가 시끌벅적한 시장통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데, 전시 자체도 특이했다. 21평짜리 좁은 전시장을 원룸으로 꾸며놓고 그 안을 270여명의 작가들의 작품으로 빼곡히 채웠다. 욕실의 양변기와 세면대, 소파·침대·옷장을 비롯해 탁자에 놓인 그릇·수저, 옷과 가방, 벽에 걸린 그림·사진, 텔레비전 속 영상물까지 작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전시기간에 현장에서 380점의 작품을 팔았죠. 관람객들은 이런 것도 전시냐며 놀랐고, 고객들은 자기 집에 어울리는 작품을 찾아내며 즐거워했습니다. 보통 전시장 백색 공간에 걸린 작품을 보면 다 멋져 보이다가도 집에 가져오면 확 달라지게 마련인데 집 같은 공간에 전시돼 있으니 느낌이 생생하죠.” 그는 현대화랑·국제화랑 등 우리나라의 내로라 하는 갤러리가 주관하는 고급 미술시장이 아니라, 중저가 시장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은 최고 엘리트 계층만 곁에 두고 완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해요. 중저가 시장이 생겨나야 미술시장이 늘어나고 그래야 작가군도 두터워질 수 있겠죠.”

고급 시장에서 내려와 대중을 만나라

사진/ 지난해 여름 ‘스톤 앤드 워터 갤러리’ 개관전으로 열린 ‘리빙 퍼니처’ 전시 도록. 류병학씨는 전시회를 열 때마다 단행본 뺨치는 전시 도록을 생산해낸다.
지난달 스톤 앤드 워터 갤러리에서 열린 아트 벼룩시장 ‘새로운 희망’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됐다. 서울 홍익대 앞 놀이터에서 벌여온 ‘희망시장’을 좀더 세련되게 변모시킨 이 장터에선 회원 작가 100여명이 만든 장신구·그림 등이 전시·판매됐다. 나아가 “한때 정말 미술을 하고 싶었던” 회사원·주부들도 틈나는 때 만든 목걸이·허리띠·스카프 등을 들고 나왔다. “단순한 노점이 아니에요. 시민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작가들에게는 고급 미술시장에서 활로를 찾기 힘든 작가들이 자라나는 통로가 돼야 합니다.”

‘리빙 퍼니처’의 2탄격인 ‘원더풀 라이프’를 기획하기 위해 한국에 머물고 있는 류씨는 전시 장소를 협찬하기로 했던 기업에서 중간에 약속을 물리는 바람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차라리 문예진흥기금 1500만원을 돌려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며 한숨을 쉬다가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미술관이 관객 없다 불평하지 말고 고객 중심으로 확 바뀌어야 해요. 그게 미술이 살아남는 길이죠.”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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