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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짜릿한 영화, 불면의 전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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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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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과 실험성 양 날개 구사하는 전주영화제…개봉 예정작에 낯선 장르의 충격적 스크린도 경험

사진/ 제4회 전주국제영화제는 고뇌하는 무거움에서 벗어나 내용 있는 가벼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은 영화제 공식 포스터.
제4회 전주국제영화제(4월25일~5월4일, www.jiff.or.kr)는 가벼운 몸으로 새롭게 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영화제 기간은 열흘로 늘어났지만, 상영하는 영화는 35개국 171편으로 크게 줄었다. 달음박질치면서 극장을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한번 놓친 영화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쪼개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에겐 171편이라는 비교적 가뿐한 프로그램도 길을 잃고 헤매기 충분한 규모. 전주영화제가 1회부터 간판 프로그램으로 내세운 ‘전주 불면의 밤’을 찾는다면 그 다음날을 숙면으로 보내더라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미카엘 하네케의 초기작

사진/ 미카엘 하네케의 초기작들은 영화적 충격을 제공한다. 10대 소년의 이유없는 살인 관찰기라 할 수 있는 〈베니의 비디오〉.
기나긴 첫 번째 밤에 빼곡히 들어찬 영화는 <퍼니게임> <피아니스트>로 충격적 경험을 제공한 미카엘 하네케의 초기작들이다. 이번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일곱번째 대륙> <베니의 비디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은 ‘폭력에 관한 3부작’으로 불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던 일상이 조금씩 경련하다가 견딜 수 없는 폭력으로 치닫는 극단의 시리즈다. 1988년 작 <일곱번째 대륙>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평범한 남자가 역시 평범한 아내와 딸과 함께 주어진 현실을 떠나 미지의 대륙에 도달하고자 하는 여정을 담는다. 그들이 택하는 방법은 파괴와 죽음. 주변 사람들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냉담과 무감각을 흔들기 때문에” 자신은 낙천주의자라 말한 하네케는 또다시 발걸음을 옮겨 <베니의 비디오>를 연출했다. 십대 소년의 이유 없는 살인을 관찰한 <베니의 비디오>는 돼지 도살기구로 친구를 살해하고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는 소년을 통해 무표정한 폭력에 강도 높게 다가서는 영화다. 마지막 <우연의 연대기에…>는 ‘단편’이라기보다 ‘편린’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한 대학생이 은행에 들어가 총을 난사한다. 이 난데없는 사건에 우연히 휘말려 들어가는 사람들, 역시 필연이라고는 볼 수 없는 비극적 내전들을 담은 뉴스릴이 이 독특한 영화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이루고 있다.


사진/ 일본 감독 하니 스스무의 작품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다. 하니 스스무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 〈불량소년〉.
전주가 하룻밤을 바친 하니 스스무는 국내에 크게 소개된 적 없는 일본 감독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주도한 일본 뉴웨이브의 일원인 하니 스스무는 다큐멘터리 연출로 영화를 시작해 차츰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극영화 데뷔작인 <불량소년>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결합할 때 가지는 무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불량소년>은 소년원 입소자들의 글모음 <날지 않는 날개>를 각색한 영화. 아마추어 배우를 기용하고 다큐멘터리 기법을 고수하면서 어느 ‘불량소년’의 한 시절을 더 넓은 파장으로 전달한다. <그녀와 그>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견고하게 분리된 아파트 단지와 빈민촌 사이에서, 방황하는 두 남녀가 존재하는 풍경이다. 아파트 주민 나오코는 눈먼 소녀를 키우면서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는 남자가 동경대 출신인 남편의 친구라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나오코는 가장 높은 곳에 설 수도 있었던 그 남자가 왜 이런 처지가 됐는지 의문을 품는다. 마지막 <첫사랑-지옥편>은 천국에 도달할 수 없는 첫사랑의 영화다. 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재혼한 어머니에게도 버림받았다. 금세공사에게 입양돼 학대받으며 자란 은 나나미라는 소녀를 만나 사랑을 하지만, 사랑을 할수록 지옥도 한층 가까워진다.

하니 스스무 만나고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체험

사진/ 흑인문화의 단면을 담은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을 경험할 수 있다. 멜빈 반 피블스의 〈스위트 스위트백스 베다스송〉.
다소 무게감 있는 다른 날들과 달리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ck+exploitation)으로 채워지는 불면의 밤은 어떤 비극 속에서도 특유의 리듬을 잃지 않는 흑인문화를 즐길 수 있는 밤이다. 1971년 <스위트 스위트백스 베다스 송> <샤프트>로 시작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은 하위문화도 하나의 장르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흑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가 흑인을 착취할 수도 있다는 부정적 면을 함께 보여줬다. 새뮤얼 L. 잭슨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샤프트>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붐을 일으켰다. 흑인탐정 샤프트는 더티 하리처럼 거칠 데 없고 대담한 남자다. 갱단 멤버의 딸이 유괴되면서 할렘을 주름잡는 샤프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업적 면이 두드러지는 <샤프트>와 달리 <스위트 스위트백스…>는 멜빈 반 피블스가 감독·각본·제작·주연·편집을 홀로 해결한 독립영화에 가깝다. 회상으로 영화를 이끄는 스위트백은 매춘부들 틈에서 성장했다. 청년이 된 그는 젊은 흑인 용의자를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백인 경찰을 살해하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멜빈 반 피블스의 아들 마리오 반 피블스는 뒷날 흑인들의 서부극 <파시>를 연출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코피>는 <재키 브라운>으로 알려진 팜 그리어의 젊은 시절 관능미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간호사 코피는 어린 여동생이 마약에 중독돼 폐인이 되자 복수에 나선다. 여전사에 가까운 터프한 외모와 아찔한 육체미가 영화보다도 더 눈길을 끌 것 같다.

사진/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는 〈원더풀 데이즈〉. 3D와 2D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주영화제는 물리적 무게뿐 아니라 정신적 무게도 감량했다. 고뇌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개봉을 기다렸던 영화들도 다수 선보일 예정. 이 중 디지털 방식으로 상영되는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와 <애니매트릭스>는 전주영화제에서 보기 드문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다. 실제작기간 4년이 소요된 <원더풀 데이즈>는 3D와 2D, 실사촬영, 미니어처를 두루 실험해 만들어낸 화려한 영상으로 주목받는 공상과학(SF) 애니메이션이다. 푸른 하늘이 사라진 2142년의 오염된 지구, 세계는 선택된 사람들이 사는 에코반과 거기에서 밀려난 외곽도시 미르로 양분돼 있다. 오염물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에코반이 생존을 위해 미르를 파괴할 음모를 꾸미면서 두 도시 젊은이들의 사랑과 갈등이 시작된다. <애니매트릭스>는 <매트릭스> 시리즈가 다 말하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라 할 만한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매트릭스>가 탄생한 배경, 기계들이 꾸는 꿈 등을 담은 에피소드 6편과 메이킹 필름 2편이 상영되며, 가와지리 요시아키, 피터 정 등 유명 애니메이터들이 참여했다.

여전히 대안의 영화도 꿈틀대고 있다

이런 유명작들이 일찌감치 매진됐다면 전주영화제의 기본정신인 ‘대안’의 영화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 독립영화 포럼’과 ‘디지털 스펙트럼’은 가난하고 왜소하지만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현재진형형의 영화들을 상영한다. 러시아로 떠난 탕자를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고향 타지키스탄으로 불러들이는 <오른쪽 어깨 위의 천사>, 임신한 미혼 여성이 방랑하는 하룻밤을 숨쉬듯 함께 따라붙는 <소피!>, 기타노 다케시의 자서전을 영화화했지만, 성공담보단 불안한 젊은 날의 초상에 가까운 <아사쿠사 키드>, 십대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키즈>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감독 래리 클락과 작가 하모니 코린의 만남 <켄 파크> 등이 빈틈을 메워줄 영화들이다. 전주영화제는 ‘대안’과 ‘대중성’ 사이에서 위태롭게 고민하고 있지만, 양극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관객은 특별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김현정 기자/ 한겨레 <씨네21>부 para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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