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자연과학에서 오랫동안 대립해온 이론 가운데 결정론과 확률론이 있다. 결정론은 우주의 모든 현상이 초기 조건에 따라 결정되며 이를 벗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 바탕에는 뉴턴 역학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어떤 입자의 경로는 주어진 시간에서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정확히 계산된다. 우주 만물은 입자들의 집합이다. 입자들의 현재 위치와 속도에 관한 정보를 모두 확보하면 아득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전 역사를 빠짐없이 추적할 수 있다. 물론 방대한 정보를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그렇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뉴턴 역학이 정말 옳다면 현실적 존재들의 운명은 아득한 시원의 순간에 이미 결정돼 있다. 시간은 모든 과정을 순서대로 펼쳐줄 뿐 누구나 각자의 경로를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20세기 들어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이 같은 결정론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양자역학에는 유명한 ‘불확정성원리’가 있으며, 내용은 한마디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위치를 정확히 알려고 하면 속도가 모호해지고, 속도를 정확히 알려고 하면 위치가 모호해진다. 이 때문에 한 입자의 현재 위치를 알았다고 해도 다음 순간의 위치를 예측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뉴턴 역학이 상정한 ‘경로’ 또는 ‘궤적’이란 개념이 성립할 수 없으며, 이로부터 유추해볼 때 운명이니 숙명이니 사주팔자니 하는 말들도 설자리를 잃고 만다.
이와 비슷한 논의는 자연과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옛날부터 치열하게 전개돼왔다. 이른바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도덕적 자유를 허용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자유의지의 긍정이 거의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사실 모든 국가의 형벌체계는 기본적으로 ‘자유에 따르는 책임’에 근거한다. 즉, 위 의문의 궁극적 해결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으로는 최소한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반면 기독교의 예정론은 인간 행동의 배경에는 신의 의지가 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유롭게 보이는 성인들의 행동도 알고 보면 어린 시절에 형성된 잠재의식의 귀결일 뿐인 경우가 많다고 본다. 또한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위력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은 모든 생물의 생애는 유전정보의 시간적 전개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두 견해의 대립은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것일까 두 견해가 나름대로 강력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어떻게든 하나의 조화로운 통합적 구도 안에서 융화하려는 시도가 제기돼왔다. 한 가지 중요한 시사가 양자역학의 또 다른 원리에 내포돼 있다. 이에 따르면 어떤 현상의 구현은 오직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확률은 엄격한 결정론적 방정식에 따른다. 바꿔 말하면 세상만사는 본질적으로 우연적인데 그 확률은 필연적이란 뜻이다. 실제로 교통사고의 경우 한 개인이 보기에는 우연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필연이다. 어쩌면 앞으로 할 일은 우연과 필연의 독립성보다 그 깊은 내막에 얽힌 긴밀한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라 하겠다.
고중숙/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일러스트레이션/ 유은주
고중숙/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