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 삽질
등록 : 2003-04-16 00:00 수정 :
한식과 식목일이 낀 연휴.
벚꽃·복사꽃의 화사함에 마음의 생명력 얻는 봄날 아침부터 밭갈이 일꾼에게 내갈 새참 준비로 밥짓는 소리가 요란하다. 서둘러 설거지며 빨래 대충 마치고 큰아들에게 빨래 널으라, 작은놈에게는 청소해라 이르고 부랴부랴 어머니, 아버님 기다리실 고추밭으로 향한다.
이장댁 트랙터는 노지 고추 심을 두렁 만들어내느라 막바지 힘을 쏟고 멀찍이 두 노인네의 손발 안 맞는 비닐 씌우기 광경이 들어온다. 성질 급한 아버님, 기다리지 못하고 세명이어야 짝이 맞는 일을 두 사람이 해내느라 애통 터진 삽질만 해댄다. 막 밭갈이 끝낸 터라 부슬부슬 흘러내리는 흙 덕에 오늘 삽질은 할 만하다 싶다.
오늘 작업량은 터널 고추 심을 600평(3마지기)만큼의 바탕 비닐 씌우기다. 가운데 긴 대막가지를 끼워 줄로 매달아 혼자서 끌고 갈 수 있게 만든 비닐을 어머니가 끌고 그 뒤를 아버님과 내가 박자를 맞추면 삽질한다. 오랜만에 하는 농사일에 금방 숨이 턱에 차올라 물 찾고, 쉴 자리 찾느라 정신없다가 차츰 일이 손에 붙는다.
“눈만큼 게으른 것 없고 손만큼 부지런한 것 없다”는 평소 어머니의 말씀마따나 눈으로 볼 때는 “은제 이 바탕 다 비닐로 메꿀꼬” 싶었는데 어느새 절반 자리에 서 있다.
텃밭에서 따온 상추쌈에 점심 뚝딱 비우고 다시 오후일에 나선다. 오전 2시간 삽질에 삭신이 지끈거려도 남은 절반의 흙바탕이 눈에 아른거려 바쁜 걸음을 놓는다.
“오늘따라 웬 차가 이리도 많이 다닌다냐 명절도 아닌디” 하고 생각해보니 한식까지 연휴랑 겹쳐 시제 지내러 오는 인파가 줄을 잇는다. 내일이 아버님 생신이다 보니 시누네, 시동생네 식구들도 오후 1시에 출발했다는 전화다.
두 양반 콩닥콩닥 말씨름 말려가며 바탕을 메꿔나가다 “몇 두렁 남았다냐” 게으른 눈으로 다시 남은 바탕을 쉬는데 저만치 가게집 아저씨가 경운기에 여자 일꾼들 싣고 딸딸거리며 달려온다. “저 집 딸들은 별것이어야. 아가씨들이 쉬는 날이믄 꼭 농사일 거든다고 수건 뒤집어쓰고 따라나선당께.” 그러고 보니 가게집 아줌마와 수건을 둘러쓴 두 딸이다. 요즘 보기 드문 젊은 아이들 모습이 반가웠다.
오후 4시, 오늘치 분량 마치고 동네 골목에 들어서니 이번 연휴 때 담장 단장하려고 맘먹고 내려왔는지 하루종일 골목길을 막고 페인트 칠하던 죽림댁 큰아들 내외는 보이지 않고 분홍색의 예쁜 담장이 골목길을 훤하게 빛낸다.
한 마지기 노지 고추 비닐 씌우기는 내일 시동생네와 고모네 몫으로 남기고 돌아와 생신떡이고 잡채고 나물이고 잊은 채 그대로 엎어져 단잠에 빠져들고 만다. 어둑해져 부스스 일어나니 차가 막혀 밤 9시나 도착하겠다는 큰고모 전화가 울리고 어머니, 아버님은 그제사 나머지 일들 단도리하고 들어선다.
이태옥/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