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고전 읽기 선언한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 경쾌한 글쓰기로 육중한 고전 창고 열어
대학에 다니던 시절,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 세계사상전집 50권을 월부로 사서는 책장 한가운데 ‘폼나게’ 꽂아놓고 한껏 즐거워한 적이 있다. 책장에 꽂히는 순간, 머릿속까지 꽉 찬 듯한 기분이란! 그러나 뿌듯함과 즐거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끄러움과 부채 의식으로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50권의 삼성판 세계사상전집 가운데 나의 손길이 닿은 것은 10%도 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통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두권에 불과했으니 어찌 민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급기야 ‘세계의 위대한 사상’들은 다른 책에 자리를 양도해야만 했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며 도맡아 먼지를 뒤집어쓰더니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파편들만 남아 씁쓸한 기억을 되살리곤 한다.
고전 전집 장만했던 씁쓸한 기억
허풍선이가 아닌 다음에야 나의 이 ‘고백 아닌 고백’에 고개를 주억거릴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고전/클래식이란 무엇인가. 그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한 액세서리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란 말에 따라다니는, 고전이 들으면 참으로 억울할, ‘고전은 읽히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고전을 읽으라’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과 대부분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고전들 앞에만 서면 턱없이 왜소해지기 십상이다. 고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짓눌려버리고, 자조와 선망 사이에서 가위눌리다 이내 지치고 만다. 고전이라는 ‘중력의 영’(니체)에 사로잡힌 난쟁이! 마침내 고전은 우리 곁을 떠난다. 아쉬움과 회한만을 남긴 채…. 그런데 이게 뭔가. 고전이라는 ‘엄숙하고 근엄한 할아버지’와 함께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기록,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기획하에 출간된 세권의 책을 앞에 놓고 나는 마냥 즐겁다. 부끄러움과 민망함과 선망과 자조와 회한을 단숨에 날려버리고 후련함 또는 희열이 대신 들어선다. 누구누구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전을 포함한 모든 텍스트는 수없이 다양한 외부와 만나면서 의미와 효과를 생산한다. 훌륭한 책일수록 잠재돼 있는 내용은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단일한 척도로는 결코 잴 수 없는 깊이와 풍성한 의미들로 가득 차 있는 고전, 따라서 그것은 다시 쓰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며, 다시 쓰임으로써 독자들은 고전으로 가는 여러 갈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진대 고전을 다시 쓰는 일은 한국의 인문학 풍토에서 지식인이 이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 아니 할 수 없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 권용선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은 각각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쓴 것이다. 권위자도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의 고전 다시 쓰기, 저자들은 엄숙한 고전 앞에서 춤을 추는, 고전과 더불어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이다. 클래식이라는 무거운 중력을 벗어나, 고전을 읽으면서 영혼을 소진해버리는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고전하고 이렇게 놀 수도 있어요!” 맞는 얘기다. 그들은 고전하고 ‘신나고 즐겁게 논다’. 고전의 저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이들에게 호통을 치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신명나게 놀면서, 기존의 통념을 비껴가면서, 고전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물론 무덤의 저자들이 호통칠 리는 없다. 이른바 고전의 전문가나 권위자들이 대변인을 자처하고 나서서 이 ‘어린아이’들을 나무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걱정 아닌 걱정이다. 하지만 몇몇 대변인들이 나무란다고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놀이를 멈출까 고전은 논문이 아니야, 동화처럼 읽어봐
이들의 글쓰기는 참으로 유쾌하고 발랄하다. 엄숙주의에 ‘똥침’을 날리기라도 하듯 도대체 거리낌이 없다. 유쾌하고 발랄하다고 했거니와, 그렇다고 이들의 책이 경박하다거나 단순한 말장난으로 고전을 희화화했다고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가벼워서 오히려 웅숭깊은 고전의 맛을 맘껏 느낄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고미숙의 말에는, 고전을 다시 ‘번역’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글쓰기 또는 문체에 대한 오랜 고민이 배어 있다. “지금 대학에서 양산하는 학문 체계는 논문이라는 표현 형식을 모든 구성원에게 부과한다. 그러므로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대학이 부과하는 코드화한 언표 체계를 습득해야만 한다.” 논문식 글쓰기를 통해 생산되는 글이란, 그의 말을 빌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저자들은 제도(권력)가 요구하는 고전 읽기의 규범을 벗어나 그야말로 자유롭게 용어를 선택, 재배치한다. 싸구려 개그 프로그램과 채팅 사이트에서나 볼 수 있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한다. 참으로 ‘발칙하다’. 그러나 새로운 배치하에서 그 말들은 또 다른 의미로 날아오른다.
들뢰즈/가타리를 친구 삼아 ‘개그맨’ 연암과 한바탕 웃음의 장을 펼치는 고미숙은 어느 순간 들뢰즈/가타리도, 연암도, 고미숙도 아닌 새로운 사유를 열어가는 ‘방랑자’로, ‘유목민’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그의 눈에 비친 연암은 국가 장치로부터 자발적으로 벗어나 끝없이 탈주의 선을 그리는 유목민이자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여행자이다. 웃음으로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 기존의 신분 체계를 가로질러 수많은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문명은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다’고 단언하는 그의 모습은 기존의 ‘실학담론’이 유포한 연암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른바 연암그룹에 속하는 인물들과 하인들과 중국의 친구들과 돈키호테, 그리고 달라이 라마 등등이 연암의 모습에 겹친다.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웃음을 무기로 소중화 사상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에 한판 유쾌한 대결을 벌인다.
니체를 친구라고 부르며 악수하고 껴안고 위로하기도 하는 고병권은 ‘타임머신’을 타고 나타난 니체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그의 생각과 고민을 털어놓게 한다. 고병권이 되는 니체, 니체가 되는 고병권. 그리곤 ‘당신들도 니체의 친구가 되어보라’고 권한다. 단순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권유가 아니다. 이 책은 <짜라투스트라>가 담고 있는 내용들을 풍요로운 식탁으로 다시 펼쳐 보인다. 신체가 왜 이성이며, 노동이 아니라 왜 전쟁을 권하는지,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왜 조심해야 하며, 삶을 사랑하기 위해선 왜 웃고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를, 니체 사상을 이해하는 키워드인 영원회귀, 위버멘쉬(ubermensch),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와 함께 조근조근 들려준다. 이 책은 ‘또 하나의 니체’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다.
‘이성은 신화’라는 자못 도발적인 화두를 들고, 인터넷 신문 자유게시판에 실린 익명의 글과 거리의 말들을 <계몽의 변증법>에 포개면서 그 의미를 살피는 권용선의 글을 읽는 재미도 적잖이 쏠쏠하다. 계몽의 계몽을 위해 쓰인 <계몽의 변증법>을 지금-여기에서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사상의 핵심이 근대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도구적 이성의 비판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 산업을 논의하는 장이 단연 돋보이는데, 이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폭력적 성격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와 주체의 탄생 의미, 사드의 줄리엣을 통한 계몽이라는 이름의 신화 비판, 우리 안에 내면화한 일상적 파시즘을 논하는 부분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고전의 세계
이들 세권의 저작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그 어디에도 중심이 없는 데다 이질적이기까지 해서 ‘기획’하에 쓰였다고 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저자들은 고전 다시 쓰기를 통해, 사방을 가로지르면서 기존의 해석 규준을 가뿐히 넘어선다. 우리는 탁월한 사상가들이 고전 다시 쓰기 과정을 거쳐 그들의 사유의 폭을 확장 심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리라이팅의 저자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제, 그들이 다시 쓴 고전을 읽는 우리는 이 책들을 길잡이 삼아 ‘고전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고전과 만나 스스럼 없이 얘기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것이 이들의 ‘리라이팅’이 지닌 최대의 미덕이다. 그러니 지레 겁먹거나 주눅 들 필요가 뭐 있겠는가!
정선태/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사진/ 고전의 깊은 맛을 새로운 감각으로 풀어낸 고병권, 고미숙, 권용선씨(맨왼쪽부터). 이들은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회원들이다.(김진수 기자)
‘고전을 읽으라’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능력이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과 대부분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고전들 앞에만 서면 턱없이 왜소해지기 십상이다. 고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짓눌려버리고, 자조와 선망 사이에서 가위눌리다 이내 지치고 만다. 고전이라는 ‘중력의 영’(니체)에 사로잡힌 난쟁이! 마침내 고전은 우리 곁을 떠난다. 아쉬움과 회한만을 남긴 채…. 그런데 이게 뭔가. 고전이라는 ‘엄숙하고 근엄한 할아버지’와 함께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기록,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기획하에 출간된 세권의 책을 앞에 놓고 나는 마냥 즐겁다. 부끄러움과 민망함과 선망과 자조와 회한을 단숨에 날려버리고 후련함 또는 희열이 대신 들어선다. 누구누구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전을 포함한 모든 텍스트는 수없이 다양한 외부와 만나면서 의미와 효과를 생산한다. 훌륭한 책일수록 잠재돼 있는 내용은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단일한 척도로는 결코 잴 수 없는 깊이와 풍성한 의미들로 가득 차 있는 고전, 따라서 그것은 다시 쓰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며, 다시 쓰임으로써 독자들은 고전으로 가는 여러 갈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진대 고전을 다시 쓰는 일은 한국의 인문학 풍토에서 지식인이 이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 아니 할 수 없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 권용선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은 각각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쓴 것이다. 권위자도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의 고전 다시 쓰기, 저자들은 엄숙한 고전 앞에서 춤을 추는, 고전과 더불어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이다. 클래식이라는 무거운 중력을 벗어나, 고전을 읽으면서 영혼을 소진해버리는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고전하고 이렇게 놀 수도 있어요!” 맞는 얘기다. 그들은 고전하고 ‘신나고 즐겁게 논다’. 고전의 저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이들에게 호통을 치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신명나게 놀면서, 기존의 통념을 비껴가면서, 고전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물론 무덤의 저자들이 호통칠 리는 없다. 이른바 고전의 전문가나 권위자들이 대변인을 자처하고 나서서 이 ‘어린아이’들을 나무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걱정 아닌 걱정이다. 하지만 몇몇 대변인들이 나무란다고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놀이를 멈출까 고전은 논문이 아니야, 동화처럼 읽어봐

사진/ ‘리라이팅 시리즈’는 고전을 지금―여기의 관점에서 새롭게 서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