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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가 뭐래도 명쾌한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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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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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에서 농익은 연기 선보인 배우 배종옥씨… 상처받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내면의 연기 돋보여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 열리던 지난해 11월의 늦은 밤이었다. <질투는 나의 힘>(박찬옥 각본·연출, 4월18일 개봉예정)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뒤 열린 뒤풀이 자리에서 성연 역의 배종옥씨에게 물었다. “실제 현실이라면, 극중의 문학잡지 편집장 윤식(문성근)과 연하의 청년 원상(박해일)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다소 짓궂은 질문이었는데, 선뜻 내놓은 답변이 이런 내용으로 기억된다. “옛날 같았으면 다소 복잡해 보이는 원상에게 더 매력을 느꼈겠지만, 지금이라면 윤식을 택할 겁니다. 윤식이 워낙 명쾌하잖아요.”

복잡한 원상보다는 명쾌한 윤식에 끌려

사진/ “모성애를 자극하는 원상보다 남에게 상처줄 여지가 없어 보이는 윤식에게 더 끌린다.” 배종옥씨는 <질투는 나의 힘>을 통해 영화적 재탄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개봉을 보름 남짓 앞둔 4월3일, 문화예술인들을 초대해 <질투는 나의 힘> 시사회가 또 한번 열렸다. 그 사이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 최우수 아시아 신인작가상을 받았고,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받으며 비평적 성공을 이뤘다. 이날 밤 뒤풀이 자리에서 배종옥씨에게 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아, 그랬어요. (웃음)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질투는 나의 힘>을 즐기는 방법은 여럿 있지만, 결정적인 건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기묘한 관계만큼이나 독특한 세 캐릭터를 음미하는 것이다. 윤식에게 이미 한 차례 애인을 빼앗긴 원상이 또 한번 성연마저 ‘인터셉트’ 당하려고 한다. 윤식이란 인물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굉장히 ‘쿨’하다. 아내 아닌 여자와 호텔을 나서다 장인과 마주친다. 소심해 보이는 장인이 그를 불러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주저하자 윤식이 먼저 말을 꺼낸다. “장인 어른, 저는 후회하며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한마디로 장인과의 ‘게임’은 간단히 정리된다. 그는 “바람도 못 피우고 아내에게도 잘 못하는 등신”이 되기보다 ‘아내와 애인, 양쪽에게 다 잘하자주의자’다. 문학과 사랑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는데 창작에 재능 없음을 일찌감치 자각한 그는 로맨스에 정진하기로 했다. 배종옥씨는 이 캐릭터를 이렇게 분석했다. “유복하게 자란 사람이잖아요. 이런 사람은 남에게 상처주지 않아요. 오히려 편안하게 해주죠. 그러니 원상마저 그에게 빠져들죠.”

원상이란 청년은 묘하다 못해 문제적이다. 애인을 뺏긴 처지에 펑크난 원고까지 해결해줬건만 오히려 핀잔을 주는 윤식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거꾸로 그의 밑으로 일하러 들어가 그의 오른팔 같은 존재가 된다. 착해 보이는 호감형의 청년이지만, 남에게 은근히 해를 끼치는 정도가 윤식보다 더하다. 하숙집 딸에게 분풀이하듯 욕정을 풀어놓고는 나몰라라다. 이 캐릭터에 대한 배씨의 분석은 이렇다.

“상처받은 영혼으로 다른 누구에게 끊임없이 상처주는 사람이죠. 그건 자기의 의도와 상관없어요. 시집살이 호되게 당한 사람이 막상 시어머니 노릇을 세게 하는 거와 비슷하달까. 그런데 이 인간은 굉장히 외롭게 자라 누군가와의 끈이 필요했는데 명쾌하게 삶을 규정하는 윤식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끌리는 거죠.”

브라운관에 비친 그와 다른 모습들

배씨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원상보다 남에게 상처줄 여지가 없어 보이는 윤식에게 더 끌린다는 ‘취향’을 솔직하게 밝혔다. 새침해 보이는 그의 외모와 달리 좀 뜻밖이다. 사생활을 물으면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해지고(‘이건 쓰지 마시고’라고 조건을 달지만), 작품을 선택하는 방식이나 삶의 원칙이 왜 그렇냐고 따져 물으면 아주 논리적이면서 몹시 빠른 속도로 설명을 쏟아낸다. 마침, 영화에서 원상이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나도 잘해요”라는 야릇한 말과 함께 그의 몸을 더듬던 소파나, 혼자 사는 그의 집이나,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소품인 ‘에스페로 8704’ 승용차가 <한겨레21> 조계완 기자의 소유물로 촬영을 위해 잠시 임대해준 사실을 밝히자, 인터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아~, 우리 우방이군요.”

혹자는 이 영화를 보고 ‘배종옥의 발견’이라고 한다. 18년 경력의 그에게 이제야 발견 운운하는 게 껄끄럽지만 그만큼 그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노희경 작가의 컬트 드라마 <거짓말>이나 <바보같은 사랑>에서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성연 역의 배종옥’을 보면 ‘저게 진짜 배종옥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일단 그는 성연과 자신이 전혀 다른 종류라고 잘라 말했다. 혹시 주변에 성연 같은 친구가 있으면 자신이 못 견뎌할 스타일이라고 한다.

“과거에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에 대해 상처받은 사람이죠.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져 부유하고 있는 거예요. 자포자기는 아니지만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상태여서 누구와 자고 안 자고는 중요하지가 않죠.”

수의사였던 성연은 문득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며 전업을 한다. 그리고 회식날 한잔 더 하자며 수작 거는 편집장 윤식을 향해 선수를 친다. “나도 그러고 싶다구요. 자고 싶다구요. 그런데 분명히 알아두세요. 이건 순전히 술 때문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구요.”

애초 시나리오에는 성연의 특성을 보여주는 가슴 노출 장면이 있었으나 사라졌다. 가슴 노출에 대해 배씨는 “자유롭지 않아서…”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여성인 박찬옥 감독에게 “이거 찍으려면 다른 배우랑 하시라”고 말하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꼼꼼한 박 감독이 한 발짝 물러섰다. “아주 오래전 찍은 <걸어서 하늘까지> 이후 영화를 잘 하지 않은 이유가 들어오는 시나리오마다 노출이 있어서였어요. 죄다 거절했지요.”

그는 아주 똑 부러진 성격이다. “노희경 작가하고도 그렇게 말했어요. 친하다는 이유로 같이 일하지는 말자. 전 친하다고 해서 선을 넘나드는 건 싫어요. 또 일에 몰두할 때는 다른 거에 매이기 싫어해요. 사랑요 아직까지 일이 충족감을 줘요. 외로움요 외롭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어요”

그는 자기 자신에게 아주 엄격하다고 했다. 어떤 때는 스스로를 가학한다는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매번 새로운 역할을 맡으려 하고 새 인물 만들기에 성공하려고 애쓰는데, 그래야 일을 오래 할 수 있을 테고, 또 그래야 진짜 목적인 자유로운 삶이 가능해질 터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유로운 삶을 이루기 위해…

“좋으면 만나고 좋지 않은 게 있으면 만나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죠 이혼했을 때, 잃은 게 많지만 별로 아깝지는 않았어요.”

그는 문화방송 아침 드라마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 유학간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그 뒤에 만난 동창생에게 버림받으면서 미혼모가 되는 인물로 출연 중이다. 이혼녀에다 미혼모라면 좀 신파적이지 않을까.

“처음에 출연을 사양했는데 그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로서 말해야 할 것이 있어 맘을 바꿨어요. 요즘 이혼이 많아져 겉으로는 사람들이 문제삼지 않는 것 같아도 저변의 의식구조는 변하지 않았어요. 교사가 미혼모가 되면 학교에서 쫓겨나고….” “드라마니까 그렇지, 요즘 시대에 실제로야 그러겠어요”라고 기자가 말하자, 그는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지며 “잘리죠! 스스로 그만두게 한다니까요!”라며 단호하게 말한다.

비련의 여주인공이지만 절대 한 방향으로 몰고 가진 않을 거라고 한다. 사람이 불행에 처했을 때도 늘 불행한 건 아니기 때문에. 재혼할 생각은 없는지 궁금한 게 사실이었다. “좋은 사람 만나면 연애는 해도 결혼을 다시 할 생각은 없어요.”

글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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