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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문학은 항복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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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4-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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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저항하는 ‘기억의 전쟁’… “이라크전 파병하는 당신의 정부는 나의 정부가 아니다”

사진/ 프란시스코 고야 (1814)

칠레 출신의 망명작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은 몇년 전 한국 작가들과 만남에서 “피노체트를 용서하되, 잊어버리지는 않겠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조국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붕괴돼 망명작가의 길에 오른 도르프만은 망명지 미국에서 소설·시·희곡·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망각에 대한 저항을 감행했다. “적(敵)이 나를 발견하는 날이면, 내가 그 아래서 처음으로 별들을 보고 이름을 지어준 늙은 느티나무를 기억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외진 땅>)

작가란 비록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에 지나지 않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전쟁 또는 제노사이드(Xenocide)와 같이 강요된 힘에 의해 자기 삶을 에워싼 뭇 존재들을 ‘역사 속 정물화’로 만들려는 경향에 대해 싸우는 자다. 그러한 ‘기억의 전쟁’은 체험이 절실할수록 간절한 호소력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절실한 체험이라도 선동문구로 전락한 문학은 감동을 자아낼 수 없다.

중동 인식의 포탈, 가산 카나파니

사진/ 1968년 한국군이 베트남의 한 마을에 진입했다 철수한 뒤 발견된 어린아이와 부녀자의 시신들(왼쪽). 48년 처형된 여순반란 가담자의 시신 앞에서 가족이 오열하고 있다(오른쪽).


팔레스타인 출신의 요절작가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y)의 위대한 정신이 거기에 있다. 가산 카나파니의 <불볕 속의 사람들>(Men in Sun, 1996, 창작과비평사 펴냄)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을 비롯한 중동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이해하게 하는 ‘피의 기록’이다. 특히 팔레스타인 문제의 심층적 깊이를 이해하려면, 이 소설의 관문을 반드시 거쳐야만 진실의 한 자락과 비로소 맞대면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컴퓨터 게임을 연상시키는 화면에서 결코 만날 수 없는 중동 문제의 실체를 여는 ‘포탈’인 셈이다.

작가는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에서 영국군과 이스라엘군에 의해 자기 땅에서 추방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겪은 고난에 찬 삶을 냉정하게 그려냈다. 무엇보다 작가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의 대변인 겸 <알하다프>의 편집인으로 활약하는 등 팔레스타인의 대표적 투사였고 이론가였다. 그는 대표작 <불볕 속의 사람들>과 <하이파에 돌아와서> 같은 작품들에서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다루는 일이 왜 팔레스타인 문제로만 국한될 수 없는가를 문학의 힘으로 증언했다.

<불볕 속의 사람들>의 주인공들은 옛 팔레스타인 땅에서 나와 10년 동안 이스라엘-요르단-이라크 일대를 유랑하며 쿠웨이트를 향해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긴다. 이들은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절박한 생존을 위해 쿠웨이트로 월경을 시도한다. 하지만 60℃가 넘는 사막의 태양과 하마신(모래폭풍)을 뚫기 위해 선택한 ‘기름찜통’과 같은 트럭 물탱크 속 탈출은 시도 자체가 무모했는지 모른다. 아니, 이들 앞에는 참된 생명은커녕 절박한 생존조차 부지하기 힘든 상황이 놓여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는 트럭 운전사 아불 카이주란의 행동을 통해 결국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동족(同族)의 변화를 침통한 눈으로 응시한다.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지내게 하라. 나는 지금 더 많은 돈을 원할 뿐이다. 더 많은 돈을.” 작가는 전화(戰禍)의 포탄에 의해 다리가 잘린 소녀의 참상을 보며 미국 유학을 포기하는 팔레스타인 청년의 편지(<가자에서 온 편지>)를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치 있는 삶을 호소한다.

1972년 7월 부비트랩이 장치된 차량폭발로 36살의 나이에 숨진 가산 카나파니의 문제의식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1967년, 1차 중동전쟁 이후 20년 만에 하이파의 옛집을 찾은 사이드 S와 사피야 부부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마음의 분단’에 대해 깊은 사유의 힘을 제시한다. 생후 5개월된 아이 ‘칼둔’을 하이파의 옛집에 두고 온 이 부부는 놀랍게도 그곳에서 스무살 청년이 된 아들을 만나지만, 아들은 이미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을 지닌 모습이다. “그런 질문을 할 권리가 없어요. 당신은 저쪽 사람입니다.” 이 작품의 문제성은 칼둔의 양부모들 역시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피해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한 인물로 설정됐다는 점이다. 적과 우군이라는 이분법적 단순함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친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이라크 전쟁의 화염 속에서 이라크 민중의 고난과 상처가 가산 카나파니의 작품에 겹쳐져 읽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쇼리들’의 강렬한 환기

사진/ 이라크전 파병 반대 시위를 벌이며 거리에 나선 문화예술인들(왼쪽). ‘어린이의 공포’. 베트남 호치민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그림(오른쪽).

세계는 지금 ‘새로운 중세’로 향하고 있는가 세계 유일의 제국(帝國)인 미국의 전횡적 일방주의는 테러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절대복종만을 강요하는 미국 주도의 패권질서를 구축하고 강화하는 듯하다. 미국은 지난 세기에 아시아·아프리카·남미 등 세계 곳곳의 크고 작은 분쟁의 원인 제공자인 동시에 전범국가의 ‘못된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했는가.

미국은 2차 대전 당시 전범국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로써 우리 한반도 주민들은 바라던 해방을 맞았지만, 그것은 분단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8월6일,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 평생을 반전평화의 삶을 살아온 스콧 니어링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라고.

그런데 그 시각,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이른바 ‘태평양전쟁’의 총후(銃後)가 된 김동환·서정주·주요한·노천명 등의 주요 문인들은 일본의 귀축영미(鬼畜英美)의 나팔수가 되어 <미영장송곡>을 부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러가라 아내라 폭악미영을/ 천리옥야 비율빈도 동양 것이요/ 석가 나신 인도 땅도 동양 것이라/ 주인 두고 너희들은 왜 들어왔노”(김동환 <미영장송곡>, <매일신보> 1942.1.13) 특히 이들은 해방 이후 “열철의 일환(一丸)”(주요한)이 되어 대동아 성전의 용사를 맹세한 입과 붓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 의한 ‘북진토벌’을 간청하기에 이른다. 친일문인들이 쓴 이른바 반미문학은 자기의 땅과 말 그리고 민족에 가한 씻을 수 없는 얼룩이다. 이와 관련해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선배문인들의 씻을 수 없는 과오에 대해 ‘모국어를 위한 참회’라는 제하의 반성문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의 경우 전쟁의 기억에 대한 ‘기억의 전쟁’은 분단문학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반공이념의 득세는 모윤숙의 <적군묘지>류의 내용 없는 탄식만을 잔뜩 양산했다. 하지만 양공주, 하우스 보이, 펨프 등 ‘슬래키 보이’ 또는 ‘쑈리들’로 전락한 전쟁 고아들의 황폐한 삶을 묘사한 송병수의 <쑈리킴> 일제 징용과 한국전쟁 통에 상이군인이 된 부자(父子)의 운명을 그린 하근찬의 <수난이대> 등은 전후문학의 소중한 성취물다. 특히 <저 산 너머 햇님>을 부르며 해맑은 동심의 꿈이 훼손되는 상황을 그린 송병수의 ‘쑈리들’은 여전히 강렬한 환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테러리스트 첸은 왜 자살폭탄을…

특히 전쟁이 할퀴고 간 정신적 외상은 치유되지 않는 상흔이 된다. 1930년대 스페인 내란을 취재한 사르트르는 소설 <벽>(1937)에서 내일 아침이면 총살대의 ‘벽’ 앞에 서야만 하는 인민전선파 사형수들의 실존의 한계와, 주인공의 우연한 지목이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도리에 어긋나는 상황에서 실존주의라는 철학적 이데아의 극명한 지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1920년대 후반 중국 장제스 정부의 상하이 쿠데타를 다룬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말로의 작품에서 우리는 테러리스트 첸(陳)이 왜 삶보다 죽음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으며, 끝내 자살폭탄을 감행하는지 낱낱이 확인하게 된다.

어쨌든 인류가 치른 전쟁 가운데 ‘자애’는 단 한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은 여성과 어린이 등 전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들이 무참히 희생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황석영의 <손님>,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 등 황해도 신천과 경남 거창 양민학살을 다룬 작품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무엇보다 한국군의 피와 야만이 스며 있는 베트남 전쟁의 참상은 어떠한 명분의 전쟁이든 “아름다운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통렬히 환기시킨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우리 작가들은 자기 모멸과 용병의 비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황석영은 “그는 여기서 알았던 그 어느 얼굴과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무기의 그늘>)라는 비애를 안은 채 귀국선에 오른다. 역시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이원규·김태수·송기원 등의 작품에서도 우리는 한국군 파병이 얼마나 큰 자기 모멸을 안겨다 주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특파원 또는 할리우드류의 시각이 아니라 전쟁의 교전상대국인 바오닌·반레·휴틴 같은 베트남 작가들의 작품은 군인을 파견한 우리 행위가 얼마나 구제불능의 추악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였는지 절감케 한다. “저는 결코 망각의 죽을 먹지 않을 거예요”라는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의 주인공의 다짐 앞에서 우리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3월25일 작가회의 주최 반전평화 행사에서 시인 김정환은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고 일상이다”(<섬광과 참혹>)라고 호소했다. 우리는 이라크의 평화와 일상을 원한다. 만일 정부에서 추진하는 한국군 파병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제2의 베트남전 파병’에 그치지 않고, 어쩌면 ‘제3의 베트남전 파병’과 같은 야만행위를 더 빨리 부추기는 행위일지 모른다. 베트남전 파병 당시 ‘단 1명’의 반대표에 비한다면 사정이 나아졌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하지 않다. 반전·평화·인권의 이름으로 이라크 전쟁에 단 1명의 의무병조차 우리는 파병해서는 안 된다. 만약 파병할 경우, 나는 이 정부가 결코 ‘나의 정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시하고자 한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gohy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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