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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Stop War 문화의 힘을 보여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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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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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대열에서 청년문화 일구는 문화예술인들…전쟁의 공포 씻는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아

사진/ ‘마음과 마음으로 전염되는 반전 바이러스-맘맘 바이러스’가 여는 릴레이 반전콘서트. 100% 자발적으로 이뤄진 공연이다.

1970년대 초등학교를 다니던 그 아이가 되풀이해서 꾸는 악몽은 귀신에 쫓기는 게 아니었다. 전쟁이었다. 다시 터진 ‘6·25사변’. 공포는 늘 구체적이고 똑같았다. ‘괴뢰군’이 무더기로 집으로 쳐들어온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누나가 잡혀가거나 모진 일을 당하는 사이 몸집이 유난히 작던 그 아이는 얼른 마룻바닥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한쪽 구석에 숨은 그 아이는 공포에 질려버린다. ‘괴뢰군이 나를 찾고 있다, 날 찾아낼까, 여긴 안전한 걸까 이제 난 어떻게 해야지.’ 겪지도 않은 전쟁이건만 학교에서, 텔레비전에서 공포를 주입받은 아이는 이렇게 숨을 헐떡이다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어른이 돼 기자가 된 아이는 어느덧 악몽을 꾸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터무니없는 공포에 자주 사로잡혔다는 기억조차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전쟁의 공포감에 휩싸였던 지난 날

사진/ 명필름 심재명 대표·이은 감독 부부가 어린 딸과 함께 처음으로 시청 ‘광장’에 나온 이유는?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이가 그 악몽을 다시 떠올린 직접적 원인은 북한 핵문제로 인한 위기설이나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아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목격한, 반전물결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반전을 외치는 이들은 한결같이 전쟁의 추악함과 폭력성을 말했고, 내면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있었다. 반전시위가 집중적으로 열린 3월22일, 현장에서 만난 <한겨레21> 김소희 기자는 “믿기지 않겠지만, 이틀 내리 이라크 소녀가 돼 쫓기는 꿈을 꿨다. 부시 때문에 성욕마저 감퇴할 지경”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두 번째로 열린 ‘맘맘 바이러스-반전콘서트’의 사회자(자신을 나비라는 아이디로 소개한 여자 대학생)는 “공습이 시작된 날 두려움에 떨다 컵을 두개나 깨뜨리고 말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는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미국, 유럽,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 등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반전시위에 비해 우리 시위와 집회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따지면 평화롭고 축제 분위기를 띤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반전을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랍계 청년이나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영국 런던의 살풍경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날 시청 앞에서 열린 집회는 지난해 6월의 월드컵 때처럼 시끌벅적한 공연과 환호가 교차했고, 무수한 깃발이 빼곡히 들어찬 종묘공원 집회에선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웃고 떠들다 연단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쳤다. 광화문까지 이어진 거리행진 역시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묘한 흥분이 시위대를 감쌌다. 붉은악마 물결과 촛불시위의 맥을 잇는 또 하나의 큰 흐름이 되고 있다는 기운처럼 느껴졌다. 자발성, 가족 또는 연인 단위의 참가, 지속성….


지난해와 다른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선전선동’이 장기인 문화예술인들의 폭넓은 참여다. 문득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1968년을 떠올렸다. 유럽 68혁명 전후로 세상을 지배한 또 하나의 물결은 히피즘으로 대변되는 반항적 청년문화였다. 이념의 세대면서도 굳은 사고를 거부한 젊은이들, 이들의 고뇌를 음악으로, 미술로, 영화로 드러낸 로커들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뉴웨이브 영화작가들. 마침 ‘맘맘 바이러스-반전콘서트’를 만들어낸 전 황신혜밴드 멤버 조윤석씨의 ‘고백’이 귀에 쏙 들어왔다(인터넷에서 릴레이 글쓰기로 이어지고 있는 ‘내가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의 첫 번째 글이다).

“나는 왜 전쟁에 반대할까 내가 좋아하던 음악가들이 전쟁을 해선 안 된다는 노래를 했다. 그리고 나를 깨우친 영화들. <지옥의 묵시록>에서 전쟁의 광기와 공포, 모순을 너무 생생하게 느꼈고, <씬레드라인>에선 ‘원하는 것은 나의 생명뿐’이란 숀 팬의 마지막 대사가 무의미하게 죽어간 병사들의 억울함으로 들렸다. 전쟁에 대한 내 생각은 결국 내가 보고 들은 영화나 음악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

지나치게 예단적이지만, 아이는 ‘청년문화로 타오르는 반전, 그 중심에 선 문화예술’이란 거창한 말로 최근의 흐름을 규정지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찾아나섰다.

문화적 반전, 그 흔적을 찾아서

사진/ 설치미술가 최병수 씨가 바그다드 침공 직전 그 한복판에서 펼쳐보인 걸개 그림 <여만의 둥지> (박승화 기자)

그날 시청앞 집회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은 유인촌씨는 “안녕하세요, 이 자리에 모이신 많은 동지 여러분…”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동지란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곧이어 영화배우 안성기·문소리씨가 격한 어조로 선언문을 읽어나갔다. “범죄가 될 것이라는 교황청의 경고에도 미국은 전쟁과 폭력의 길을 선택했다. 야만스럽고 뻔뻔스럽고 더러운 침략전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하겠다고 한다. 국익을 우선하거나 북한 핵문제와 맞바꾸는 건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두 사람의 외침이 “미국이 저지르고 있는 일을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거나 “우리 정부의 지지를 반드시 중단시키자”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목덜미가 잠깐 서늘해지기까지 했다. 21일 청와대 앞에서 파병반대 1인시위(참여연대 진행)를 벌인 영화배우 방은진씨도 같은 어조였다. “한-미 간 동맹관계나 북한 핵 등 안보관계 때문에 정부가 떠밀리듯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하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위에 나섰어요. 미국이 얼마나 자주 말을 뒤집어요. 우리도 신의를 내세울 게 아니죠. 사실 코앞에 닥친 작품 준비 때문에 정신없지만 여력이 생기는 대로 참여할 생각이에요.”

방씨와 마찬가지로 청와대 앞 1인시위를 벌인 신해철씨는 참여 동기를 묻자 잠시 어이없어하더니 “그럼, 이거 안 하면 뭐할 건데요”라고 나무라듯 말했다. 신씨가 대선 전 텔레비전에서 한 노무현 후보 지지연설은 꽤 화제였다. 유창한 말솜씨로 대중음악계 분위기를 순식간에 정리해줬다.

“우리나라 음악인이 사회참여 의식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다양한 탄압에 시달려왔어요. 국민 스스로의 탄압도 있었죠. 광대로 취급하면서 너희가 뭘 아느냐고.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나 하지 뭘 나서느냐고 한 것과 똑같이. 대중예술인들이 자기 안에 있는 욕구를 표출하는 직업 특성상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데 능숙하면서도 카메라 들이대고 민감한 사안에 대해 물으면 입을 다물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붕어, 붕어’(립싱크 가수)라는 이들도 사석에서 보면 정치의식이 높아요. 그런데 2, 3년만 연예생활하면 국민이나 매니저들이 ‘입닥쳐, 입닥쳐’ 하거든요. 저야 짬밥 수가 많으니까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그런 만큼 목소리를 좀더 높여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것도 있고….”

신씨는 많은 대중음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쟁반대와 이라크 파병반대 기자회견을 열 것이라고 했다. 누가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게 아니라 사발통문식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봄여름가을겨울·전인권 등 중견 음악인부터 아이돌 스타들까지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고 즉각적이란다. 록밴드들은 두세 시간 만에 수십개 팀이 참여하기로 할 만큼 열렬하다고 전했다.

“이제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사진/ 다음 미디어에 올려진 부시 풍자 만화(왼쪽). <스타워즈 에피소드2>에 빗댄 패러디 포스터 <걸프워즈 에피소드2>.

시청앞에서 만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이은 감독 부부는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딸과 함께 ‘스탑 워’(Stop War)라고 쓴 인쇄물을 흔들고 있었다. 이들은 월드컵 때도, 촛불시위 때도 찾지 않던 광장에 처음 나온 것이었다. 인터넷 문화인 모임 카페에서 서로 ‘우울한 심정’을 토로하다 이렇게 우울해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집회에 나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달래보자고 화가 임옥상씨 등과 이야기를 나눈 끝이었다. 마침 검은 선글라스를 쓴 임옥상씨가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는 게 눈에 띄었다. 이은 감독은 25일 영화인회의 모임이 있는데 영화인들의 반전운동 참여방안을 정식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인간방패 등으로 이라크 현지에서 활동을 벌이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문화예술인이다. ‘박기범의 이라크 통신’으로 인터넷의 네티즌 사이에 화제를 모은 인간방패 박기범씨는 동화작가고, 다큐멘터리 작가 성혜란씨는 인간방패로 활동하며 다큐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또 소설가 오수연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파견 작가’로 이라크 현실을 취재 중이다. 설치미술가 최병수씨는 3월16~17일에 바그다드 중심가 알 타흐리르 스퀘어(해방광장)에서 높이 6m, 너비 8·4m짜리 대형 걸개그림 <야만의 둥지>를 앞세워 인간방패 유은하씨와 함께 반전 퍼포먼스를 벌였다. 최씨는 <한겨레21> 문화팀 이주현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바그다드 시민들의 표정은 이골이 난 듯 무심했으나 반전시위를 벌이러 왔다는 말에 상인들이 걸개그림을 걸 도구를 공짜로 줬다. 바스라에서 걸프전 때 방사능에 노출돼 고생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몹시 가슴이 아팠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이 아이들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의 반전 움직임을 하나의 청년문화로 볼 수 있다면 주요 근거는 자발성이다. 위로부터의 조직화가 아닌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이상열기’다. ‘맘맘 바이러스-반전 콘서트’가 모범적 표본이다. 20살의 문화기획자 제리(박재식)가 까치(조윤석)라는 친구에게 보낸 메일이 시작이었다. ‘내가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라는 짧은 메일이었다. 메일을 주고받는 수가 5명으로 늘었고, 각자의 일상생활이 끝날 무렵인 밤 10시쯤 모인 이들은 관심 있는 주변 사람들을 한명씩 한명씩 메일 리스트에 초대했다. 문화기획자, 문화평론가, 비디오 아티스트, 디자이너, 전시기획자 등이 모였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염되는 반전 바이러스-맘맘 바이러스’가 만들어졌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가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를 테지만 그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작은 콘서트를 만들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따로 예산이 있을 리 없고, 전력을 다할 실무자가 있을 리 없다.

자발적 참여로 이어지는 반전 콘서트

사진/ “총 대신 기타를, 작전명령 대신 노래를.” 22일 시청 앞 반전집회에 참여한 가수 안치환, 이은미, 장사익씨(왼쪽부터).

그러나 반전 콘서트는 매주 토요일 저녁 8~10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15일 열린 첫 콘서트에는 강산에씨가 나왔다. 물론 ‘노개런티’다. “2집이니까 94년에 만든 노래네요. 아티스트들이 환경문제라든지 근원적이면서도 범인류적 이야기를 하는 걸 많이 봤는데 내가 자란 여기에서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 어린 마음에 만든 노래입니다. 될 수 있으면 이런 노래를 부를 자리가 없어야 하는데 결국 오늘 이 노래를 부르게 되네요.” ‘스탑 더 워’가 반복되는 반전노래 <더 이상 더는>이었다. 29일에는 ‘3호선버터플라이’가, 4월5일에는 이상은·어어부밴드 등이 출연할 예정이다.

전시기획자 김중기씨는 홍대앞 카페 시월에서 열 ‘A4 반전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큐레이터가 작가들을 선정해 작품을 받는 게 아니라 메일 발송을 통해 자발적 참여를 이끄는 방식이다. 작품은 경매에 붙여 반전기금에 보탤 계획이다. 공연기획자 주홍미씨는 동료들과 술 마시다 문득 “60년대의 반전가수 밥 딜런을 초청해 반전과 평화를 주제로 한 공연을 열면 어떨까”란 이야기를 꺼냈다. 작업은 신속히 이뤄져 곧바로 밥 딜런의 응낙을 받아냈고 공연은 7월 말께 열릴 예정이다.

청년문화의 수용자이자 실천자는 보통의 젊은이다. 22일 종묘공원 집회장에 마련된 ‘반전 장터’의 주최자 가운데 한명이던 김혜진(19·서울여대 1년)씨가 맘맘 바이러스의 반전 콘서트에서는 관객으로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월드컵 때 붉은악마로 거리에 나와본 뒤 ‘재미’가 붙어 촛불시위로, 반전집회로 참여를 이어가고 있었다. “인터넷의 콘서트 게시판에 갔다가 거리를 다니며 내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두건이나 티셔츠를 입고 싶은데 파는 곳 없느냐는 질문을 올렸더니 여러개 리플이 붙으면서 아예 직접 만들어 팔고 입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어요. 3~4일 만에 20여명으로 구성된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고 직접 티셔츠를 제작해 팔게 된 거죠.” 학교 동아리나 학생회에서 활동은 하지 않느냐고 묻자 “너무 조직적인 것 같고 깃발이 부담스러워 그쪽은 안 한다”고 했다.

네티즌들 사이의 뜨거운 분위기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다만, 네티즌들이 전쟁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는 방식은 패러디를 통한 조롱과 재미가 압도적이다. 이런 식이다. “(송강호 버전) 막 패 그냥 막패…. 그리고 석유 찌꺼기를 (부시) 3대 모두 불러놓고… 고마 막 퍼멕이는 거야 그냥 막 호스 목구멍에 처박고… ~~ ㅁ ㅣ ㅊ ㅣ ㄴ 부시 3대… 아 열 받아.”(아이디 ‘불쌍한 전쟁 피해 아이들을 사랑하는 송강호가’)

새로운 문화 이끄는 계기 될 것인가

다음 미디어에 올라 있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가장 큰 이유’를 묻는 설문에 8만여명이 응답했다. 석유이권 확보에 67%가 동의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국제사회 패권유지에 14.5%가, 미국 군수산업보호에 7.7%가 동의했다. 테러지원세력과 대량살상무기 제거와 이라크에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항목의 응답자는 각각 7.9%와 1.7%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반전 움직임을 청년문화로 등치시키는 건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분위기가 이어져 어떤 문화를 이뤄간다면…’이란 상상을 악몽에 시달린 그 아이는 해본다. 지금의 아이들은 적어도 터무니없는 공포감이 사라진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글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사진 류우종 wjryu@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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