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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머리 백조 ‘호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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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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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 형식으로 무대에 오르는 <백조의 호수>… 백조의 놀라운 변신을 즐기고 싶지 않은가

고요한 호숫가, 사냥에 나선 지그프리트 왕자가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한 오데트 공주를 만난다. 왕자는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대적 사랑을 약속하지만, 마법사의 계략에 빠지는 바람에 오데트로 변장한 마법사의 딸 오딜과의 결혼을 공표한다. 나중에 속은 것을 안 왕자는 오데트 공주와 함께 호수에 몸을 던진다. 이들의 슬프고도 위대한 사랑은 영원 속에서 위로받는다….

사진/ 스웨덴 출신 안무가 마츠에크는 오데트 공주를 건강하고 개성 강한 ‘대머리 백조‘로 표현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조의 호수>는 이랬다. 비록 속임수에 넘어가지만 마법사와 결투를 벌이는 왕자는 여전히 멋있고 용감무쌍하며 백조 공주는 비련의 주인공답게 가냘프고 우아하다. 날씬하다 못해 끊어질 듯 가는 다리, 백조 깃털처럼 날아갈 듯 눈부신 순백색 튀튀(짧은 여자 무용복)는 오랫동안 오데트 공주를 대표해왔다.

왕자가 이처럼 씩씩하지 않다면 백조도 아름다운 공주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은 어떤 식으로 펼쳐질까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에 대한 통념을 철저히 깨뜨리는 파격적인 <백조의 호수> 두편이 우리나라에 온다. LG아트센터는 한달 간격으로 스웨덴의 마츠 에크가 이끄는 쿨베리 발레단과 영국 안무가 매튜 본의 어드벤처 인 모션 픽처스(AMP) 무용단을 초청한다.


원작의 통념을 철저히 깨뜨리는 파격

사진/ 쿨베리 발레단이 선보인 <백조의 호수>는 나약한 왕자가 진정한 자아와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4월3~5일 무대에 오르는 쿨베리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지그프리트 왕자의 ‘성숙’이 주제다. 아버지 없이 자란 왕자는 어머니 옷자락에 매달려 평생을 살아온 마마보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왕자는 꿈에서 자신이 그려오던 이상형을 만난다. 하지만 백조는 전통적인 오데트 공주와 닮은 점이 없다.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건강한 백조다. 오늘날 북유럽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개성적인 억척 아가씨에 가깝다. 꿈에서 깨어난 왕자는 자신이 어머니의 품을 벗어날 때가 됐음을 깨닫고 진실한 사랑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 곳곳에서 왕자는 여자를 짐승처럼 취급하는 스페인 마초 투우사, 완력으로 자신의 무능을 보상받으려는 마법사 등을 만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심술궂은 흑조는 왕자 주변을 맴돌며 계속 유혹의 몸짓을 보낸다. 결국 왕자는 꿈속에서 그리던 백조를 만나지만 알고 보니 백조와 흑조는 같은 인물이었다. 선과 악은 오데트와 오딜로 갈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여자 안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왕자는 이것을 깨닫고 놀라움에 가득 차 무대를 떠난다.

이 무대에선 지그프리트 왕자를 빼고는 모든 등장인물이 대머리다. 남녀 무용수들이 뒤섞인 백조 무리는 발레 슈즈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춤춘다. 무용수들은 몸을 비튼 채 뒤뚱거리며 움직인다. 전기에 감전된 듯 머리를 우습게 흔들어대고 큰 소리로 웃어젖힌다. 대머리 백조들이 튀튀를 입고 춤추는 모습을 보면 우아한 백조도 ‘조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 쿨베리 발레단 <백조의 호수>
1877년 차이코프스키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한 <백조의 호수>는 발레리나와 안무가의 형편없는 실력 때문에 호평받지 못했다. 1895년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4막으로 다듬어 내놓은 발레극은 잘 짜인 이야기 구조와 음악, 아름다운 춤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 뒤 <백조의 호수>는 안무가들이 부분부분 손댔을 뿐 줄거리틀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로부터 꼭 100년 만인 1987년, 쿨베리 버전의 <백조의 호수>는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에 익숙한 관객들을 기겁하도록 만들었다. 일부 관람객들은 공연 도중에 일어나 나가버렸고 거세게 비판했다. 아름다운 오데트 공주가 대머리 공주로 전락한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발적인 <백조의 호수>가 던진 충격은 안무가들의 창작 에너지에 불을 붙였다. 이후 고전을 더 자신감 있게 각색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상상력으로 백조에 생기 불어 넣어

사진/ 영국 안무가 매튜 본은 백조역에 가냘픈 발레리나 대신 힘이 넘치는 남성 무용수를 택했다.

안무가 마츠 에크는 “완전히 고전적이지 않을 바에야 완전히 재창조하라”고 말한다. 마츠 에크는 <백조의 호수>말고 여러 고전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열중해왔다. 1982년작 <지젤>에선 여주인공 지젤은 조롱받는 바보였고, 1996년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선 10대의 마약중독자인 오로라 공주가 과보호 속에 자란 힘없는 왕자와 싸운다. 배우인 아버지와 무용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마츠 에크는 이처럼 고전의 줄거리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바꾸고, 이야기를 몸짓으로 전달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여왔다.

쿨베리 발레단이 <백조의 호수>를 선보인 뒤 8년이 지나 영국 안무가 매튜 본이 선보인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 역시 빛나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5월20일~6월1일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를 이 작품의 배경은 1950년대 영국 왕실이다. 매력적이지만 냉담한 어머니 기세에 눌려 살아가는 왕자는 늘 위축된 모습이다. 신분 차이라는 이유로 평민 여자와의 연애도 좌절되고 뭐 하나 제 맘대로 되는 것이 없는 왕자에게 어느 날 꿈에서 보던 백조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강인한 날개로 힘차게 도약하는 남자 백조다(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 발레를 배우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른이 된 주인공이 맡은 역이 이 백조다). 왕자는 백조에게 위안을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더 큰 혼란이었다. 궁정 무도회에 꿈속의 백조와 꼭 닮은 낯선 젊은이가 나타난 것이다. 매력 만점의 이 청년은 곧 왕비와 눈이 맞고, 질투심에 사로잡힌 왕자는 왕비를 공격한다. 제정신을 잃고 괴로워하던 왕자는 마침내 이상형인 백조의 품에 안겨 마지막 숨을 거둔다.

현대 발레의 한계 극복하는 탈출구인가

사진/ 매튜 본 버전의 지그프리트 왕자는 섬세하고 연약한 남자로 등장한다. 왕자는 강인한 날개를 지닌 힘센 백조를 동경한다.

매튜 본이 잡아낸 백조의 이미지는 힘과 폭력이다. “남자 백조라는 아이디어는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다가왔다. 백조의 아름다움과 거대한 날개는 하얀 튀튀를 입은 발레리나보다 남자 무용수의 근육을 연상시켰다. 발레리나는 물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새의 고귀한 아름다움을 성공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본 한 필름에선 백조가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작은 낚싯배를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정말 무서운 장면이었다. 그 공격성을 무대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이런 까닭에 남자 백조를 사랑하는 왕자는 동성애자로 비칠 수 있지만 한편으론 강인한 자아를 갈구하는 약한 남자로도 다가온다.

무용평론가 문애령씨는 “마츠 에크와 매튜 본 모두 파격적인 구성을 갖췄지만 매튜 본의 백조가 좀더 고전적인 춤의 구성에 닿아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원형 그대로 공연되지 않더라도, 고전 발레는 주제와 소재가 고갈된 현대 발레의 한계를 극복하는 탈출구로서 그 가치가 영원히 빛난다”고 말했다(문의 02-2005-0114).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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