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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짐들의 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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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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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햇살에 겨우내 얼었던 몸 녹이러 물무산을 오른다. 밭둑엔 냉이며 쑥이 봄나물 값하느라 여기저기 고운 새순을 내밀고 있다. 요맘 때 밭둑가에 핀 곰방부레나물 뜯어다 참기름에 무치면 쌉싸래하니 고소롬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절반은 된장 풀어 나물국 끓이면 뚝딱 밥 한 그릇 말아 해치우고 바쁜 아침걸음 재촉하기 딱 좋다.

물무산 초입에 들어서니 왜콩(강낭콩) 새순이 삐죽이 올라온 틈바구니에 물기 머금은 땅심 믿고 터잡은 잡초들이 할머니 호미질에 거름신세가 돼버린다.

아침저녁 싸한 바람에 질려 겹쳐입은 옷들을 도로 하나씩 벗어버리고 봄냄새에 바람난 아짐들 마음 들떠 허방을 걷듯 한다.

3년간의 고생 끝에 이혼하고 다시 고향으로 아이들과 내려온 미선씨에게 물무산 봄바람은 예사 것이 아닌 듯하다. 머리털 나고 처음 와보는 산행이지만 위태로운 발길이 점점 안정을 찾는다.

겨우내 하우스에서 집으로 종종걸음치며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며 넘어갈 듯 웃어젖히는 파프리카 아줌마의 봄냄새는 노랗고 빨갛고 주황인 파프리카와 닮았다.

서방 흉 서리서리 보다가도 밥시간 땡 맞춰 차려내느라 2차에 끼어들지 못하는 왕언니는 넘치던 시심(詩心)을 기대했는데 “내 나이 돼봐”라고 씩씩거리며 마치 물무산과 싸움이라도 할 태세다.

등산이라면 아무라도 따라간다는 윤화씨는 동네 앞마당 걷듯 가뿐한 발걸음을 옮기며 지천에 널린 냉이 못 캐어 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발길을 떼지 못한다.


노란 망울 달고 선 산수유에 기대 똥폼 잡으며 사진 한장씩들 남기고 다섯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니 꼭대기다. 남들은 스치듯 지나는 꼭대기에 늘펀하게 앉아 파프리카의 달큰한 맛에 목 축이고 또는 맥주로 갈증 달래며 묵은 겨울수다들을 봄볕에 내놓는다.

그 사이 아이들은 팔각정에 올라 저희 발아래 영광땅 내려다보며 할머니집·이모집 찾느라 “야호”도 잊어버린 채 찧고 까분다.

“오메 오메, 오랜만에 수다떤 께 속이 다 시원하구먼. 이렇게 가까운 산을 평생 첨 와보니 이것이 뭔 일이당가” 영광토박이 3명은 지척의 물무산을 30, 40년이 넘어서야 처음 밟아봤단다.

그 사이 많은 사람이 오가며 우리를 힐끔거려도 수다에 빠져버린 아줌마들 엉덩이는 무겁디 무겁다. 다른 사람들 한 봉우리 오를 만큼 돼서야 추운 기 느낀 아줌마들 발걸음 떼고, 봄볕 타는 산에는 아줌마들이 남긴 자매의 정이 질펀하게 깔려 있다. 눈앞의 물무산에는 아직도 그날 남긴 봄수다가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아짐들 수다 찾으러 가고 싶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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