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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시는 순대를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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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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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굶주렸다면 이라크를 괴롭히지 말고 풍성식당의 세계 최고 순대를 맛보시라

사진/ 여주인 최옥준씨는 30년 넘게 푸줏간을 운영하면서 바로 옆에 순대전문점 풍성식당을 열었는데, 동네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직접 만든다.
부시의 이라크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이라크가 9·11 테러의 배후 조종·지원 국가고, 또 대량살상무기를 은닉하고 있어 인류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공격 이유를 댔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지구인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뒤 양질의 이라크산 석유를 헐값으로 미국이 독점하고, 또 전쟁을 통해 재고 첨단무기를 소진시켜 미국 군산복합체의 배를 불려주려는 부시 정부의 속뜻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결국 있지도 않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이라크 국민을 ‘대량살상’하고 있으니 부시는 피에 굶주린 사람인가.

지금은 사라져버린 언어지만, 만주어 ‘셍지’(senggi)는 피를 뜻한다. ‘셍지’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짐승의 피를 가리키는 말인 ‘선지’가 되었다. 또 들볶여 귀찮다는 뜻인 ‘성가시다’의 옛 표기는 ‘셩가다’인데, 원래의 뜻은 ‘파리하다’다. 그리고 이 말은 만주어 ‘셍지 각시’(senggi-kaksi)에서 나왔는데, 바로 ‘셍지’는 피를, ‘각시’는 게우다·뱉다를 뜻한다. 곧 ‘성가시다’는 피를 게워 파리한 상태를 말하는데, 나중에 들볶여 귀찮다는 뜻으로 변했다.

순대는 만주어로 순대를 가리키는 ‘셍지 두하’(senggi-duha)에서 나왔다. ‘순’은 피를 뜻하는 ‘셍지’에서 나왔고 ‘대’는 창자를 뜻하는 ‘두하’가 변형된 것이다. ‘대’가 창자를 뜻하는 것은 ‘대’가 변형된 배때기의 ‘때’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곧 순대는 동물의 창자에 피를 담아 만든 먹을거리인데, 기원은 몽골인들의 음식문화에서 보인다. 몽골인들은 가축에서 얻는 고기와 짜낸 젖과 젖으로 만든 유제품을 주식으로 한다. 영화나 문학작품들에서는 초원에서 마구 가축을 도살해 고기를 구워먹는 장면이 흔하게 나오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몽골인들에게 가축은 가족의 생명을 이어주는 전 재산이기 때문에 도살은 꼭 필요한 때만 한다. 대신 수시로 젖을 짜서 술·유제품을 만들어 식량으로 확보하고, 젖을 짤 수 없는 겨울에는 고기가 주식이 된다. 그러므로 가축을 도살하면 고기뿐 아니라 내장·뼈·피·가죽까지 알뜰하게 이용한다.

몽골의 순대로 게데스가 있다. 양의 피에 메밀가루와 야생 마늘·부추를 넣고 소금을 섞어 간을 해 창자에 담아 솥에서 끓인다. 이것이 농경사회인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재료와 기호가 변형된 우리 순대가 되었다. 게데스는 내용물로는 순대면서 순대란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옛 조리서들인 <음식디미방>(1670년께)에서는 개의 창자를 이용한 순대를 개장(犬腸)이라 했고, <주방문>(1760년께)에서는 쇠창자에 선지를 넣어 삶은 선지순대 만드는 법을 황육 삶는 법이라 했다. 또 쇠창자에 고기를 다져 온갖 양념과 기름장을 간 맞추고 섞어 가득히 넣고 쪄낸 순대를 <증보산림경제>(1766년), <규합총서>(1815년) 등에서는 우장증(牛腸蒸)이라고 했다. 이처럼 순대식 조리법은 있되 음식 이름으로는 존재하지 않다 <시의전서>(1800년대 말)에 와서야 비로소 순대라는 용어가 등장했으니, 병자호란 이후에 정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10여년 전 일이다. 어느 날 영화감독 장선우와 ‘탑골’에서 술을 마시다 밤 12시가 넘어 의기가 투합해 탑골 여주인 한복희씨와 함께 여주 신륵사 원경 스님을 찾아갔다. 원경 스님은 새벽 두세시에 들이닥친 우리 일행에 잠시 얼떨떨하다 남한강 모래밭으로 함께 나가 총총한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로 날밤을 샜다. 이튿날 원경 스님은 “누가 먹어보았는데 맛있다고 하더라”며 입안이 깔깔한 우리를 데리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시골 장터의 허름한 순대국밥집을 찾아갔는데, 이 집이 오늘날까지 내가 ‘세계 최고’로 치는 경기 용인시 백암면 백암리 소재 풍성식당(031-332-4604)이다. 이 집 여주인 최옥준(69)씨는 30년 넘게 푸줏간을 운영하면서 바로 옆에 순대전문점 풍성식당을 열었는데, 여기서 파는 순대는 동네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직접 만든다(순대국 4천원, 순대접시 6천원).


김학민 ㅣ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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