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빛나는 언니들
등록 : 2003-03-20 00:00 수정 :
기관총을 들고 객석을 향해 미소짓고 있는 두 주인공은 남편과 애인을 살해한 ‘타락한 언니들’이다. 범죄를 뉘우칠 기미라곤 손톱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뮤지컬 영화 <시카고>(3월28일 개봉, 감독 롭 마셜)에서 이들은 ‘멋들어진 언니’로 떠오른다. 신나는 노래에 니콜 키드먼의 매혹을 물씬 풍겼으나 이야기나 캐릭터가 그저 그런 뮤지컬 <물랑루즈>보다 적어도 두배의 재미를 안겨주는 비결의 하나도 이 언니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골든글로브는 이 영화에 작품상과 남자배우·여자배우 주연상을 안겨줬고, 아카데미에는 13개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려놨다). 첫째, 연약하기 그지없는 이들은 마피아 알 카포네가 주름잡던 1920년대 시카고에서 타락한 변호사와 언론,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대중을 멋지게 조종해 자신의 운명을 끝장내려 한 세상을 기막히게 한방 먹인다. 둘째, 두 언니는 매우 속물적이고 그만큼 타락했지만 이들보다 더 타락한 세상에서 그들의 욕망은 사악하기는커녕 솔직담대한 것으로, 나아가 사랑스러운 것으로 증류된다. 두 언니를 미워하느니 차라리 돈을 위해 법정 증거도 서슴없이 조작하는 변호사나, 그의 손에 놀아나는 언론의 선정성을 미워하게 된다. 셋째, 두 언니는 티격태격 끊임없이 다투며 서로를 미워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턱하니 연대를 해버리는 통 큰 배포를 갖고 있다. 넷째, 거룩한 성녀가 되지 않고서도, 냉소적인 세상을 냉소적으로 대하지 않고서도 세상이 떠받드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이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질퍽하지만 대단히 열정적이어서 보는 이의 맘까지 뜨겁게 한다.
매혹적인 춤과 노래로 스타 자리를 굳혀온 벨마 켈리(캐서린 제타 존스)는 무대 파트너인 동생과 남편이 한침대에서 나뒹구는 걸 보고 서슴없이 그들의 목숨을 거둬간다. 록시 하트(르네 젤위거)는 무대를 주름잡는 벨마를 동경하며 스타를 꿈꾼다. 그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외판원의 수작에 넘어가 남편 몰래 정사를 이어가지만 속은 걸 알고는 그의 가슴에 가차없이 총알을 박아넣는다. 교도소에서 마주친 이들은 곧 앙숙처럼 지내는데, 대중이 원하는 스타를 만들어낼 줄 아는 변호사 빌리 플린(리처드 기어)과 손잡고 누가 먼저 무죄방면되느냐는 경쟁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뿌리는 꽤 길다. 1926년 쿡 카운티의 한 공판을 지켜본 <시카고 트리뷴>의 법정기자 모린 달라스 킨스는 냉소적이고 신랄한 희곡 한편을 썼고, 이는 <작고 용감한 아가씨>란 제목으로 초연됐다. 이어 1927년 무성영화 <시카고>로, 1942년 유성영화 <록시 하트>로, 1975년 뮤지컬 <시카고>로 대를 이어 만들어지면서 대중적 인기를 누려왔다.
이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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