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 재발견하며 언니로 살아가는 사람들… 씩씩한 여성·섬세한 남성 포괄하는 수평적 호칭
여성학 강사 권김현영(28)씨는 최근 메신저 아이디를 ‘금실언니 화이팅’으로 바꿨다. ‘대통령과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강금실 법무장관이 사뭇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필’이 꽂혔다.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뒤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검찰조직으로부터 ‘왕따’당한 일들을 들을 땐 울분도 느꼈다. 강 장관에 대한 공감은 이후 인터넷에 속속 꾸려진 강 장관 팬클럽의 열기로 이어졌다. 네티즌들은 강 장관을 ‘언니’, ‘누나’로 부르며 힘내라는 응원의 글을 올렸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법무장관’이라는 화려한 수식에서 오는 거리감 대신 똑똑하고 야무진 ‘금실 언니’로 국민에게 다가온 것이다. 권김씨는 “강 장관이 앞으로 정말 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연스레 언니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이날 토론회에선 마치 노 대통령이 여동생을 챙겨주는 ‘오빠’ 같은 모습이었다. 앞으로는 ‘금실 언니’가 ‘노 오빠’의 도움 없이도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금실 언니의 홀로서기를 기대하는 까닭
하자센터 웹팀장 조지혜(28)씨는 “우리에겐 ‘언니’라고 부를 만한 공적인 인물이 별로 없었다”고 분석한다. “같은 여성 장관이어도 한명숙 장관은 ‘명숙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동안 여성들이 본받을 만한 인물은 ‘언니’라기보다는 ‘선생님’ 같은 이미지였다.”
보통 어린 동생들에겐 언니가 거울이다. 언니의 말과 생각을 따라하며 큰다. 언니라는 호칭에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앞서간 역할모델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강 장관의 경우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생생히 전달되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고생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감성대를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언니라는 말이 이처럼 항상 긍정적인 맥락 속에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흔히 언니라는 말을 주고받는 곳은 옷가게·미용실·음식점·카페 같은 곳이다. 나이 많은 여자 손님도 자기보다 훨씬 어린 백화점 점원에게 언니라고 부른다. 식당에 온 20대의 여자도 어머니뻘 됨직한 이에게 “언니, 여기 주문받으세요”라고 말한다. ‘언니’는 서비스를 주고받는 곳에서 마땅히 서로 부를 말이 없을 때 대충 쓰는 호칭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언니’가 여자들끼리만 쓰던 말은 아니었다. ‘싸나이 중의 싸나이’ 임꺽정도 언니였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선 동생뻘 되는 의형제들이 ‘꺽정 언니’란 호칭을 쓴다. 당시엔 남자들끼리 서로 부를 때 ‘형’ 대신 ‘언니’라는 말을 썼다. 이후 ‘언니’가 여자들끼리 쓰는 말로 굳어지면서, 이 말이 혈연으로 맺은 자매관계를 넘어서자 여자 고객과 여자 점원 사이에 쓰이는 비공식적인 호칭으로 자리잡았다. 이때 ‘언니’들은 주로 폼나지 않는 곳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를 굽혀 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그동안 여성들이 권력을 쥔 힘있는 자리에 서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객과 점원 사이에 쓰이는 ‘언니’는 여성의 취약한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셈이다. 홀대받는 여성의 호칭에서 평등의 기호로
하지만 ‘언니’가 지닌 정답고도 친근한 의미는 남자들에게도 스며들고 있다. ‘꺽정 언니’와는 다른 의미다. 여성적 감수성을 지니고 여자들과 어울리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 ‘남자 언니’도 있다. 이들이 대변하는 ‘언니즘’ 또는 ‘언니주의’는 서열과 형식을 중시하는 사회에 대한 반대, 여성성에 대한 재발견을 아우른다. 나아가 ‘오빠주의’에 대한 반대 의미도 지닌다.
대학원생 조아무개(29)씨는 연구실 동료들로부터 ‘언니’라 불린다. 대화에서 주제를 독점하지 않되 자신의 의견을 강변하지 않고 조근조근 풀어놓는 모습에서 동료들은 ‘언니다움’을 발견했다. 조씨는 “형이라고 불릴 때는 사회적인 인맥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나는 너를 따라가겠다는 식의 보수적인 느낌이 들었던 반면, 언니라고 불릴 때는 사회적 서열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과, 서로에게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XY염색체의 ‘언니’들은 여성성이란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30대의 ‘신지 언니’는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오빠’였다. 그가 변한 것은 졸업 뒤 페미니즘에 눈을 뜨면서부터다. “남자들이 자기 여자친구에 대해 얘기할 때 본인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거나 자기 소유물처럼 말하는 걸 들을 때는 기분이 나빠졌다. 남자들끼리 주고받는 거친 억양과 표현도 부담스러워졌다. 남자들끼리 맺는 관계가 싫어지면서 언젠가부터 나도 ‘언니’가 됐다.”
자유로운 소통… 남자 언니로 ‘커밍아웃’
회사원 정아무개(41)씨는 자칭 ‘언니주의자’다. 그는 서로 친해지면 나이 차이와 상관없이 아무개씨나 아무개 누나가 아니라, 아무개 언니로 부른다. 그 또한 여자들로부터 ‘정 언니’로 통한다. 임씨는 “내가 언니라고 부를 때는 나 또한 그들이 속한 여성세계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의식적·무의식적 바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를 ‘언니’라 부르는 한 여자 동료는 “거대담론으로 포장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자잘한 이야기들을 놓고 함께 수다를 떠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여자들과 자주 어울리는 ‘남자 언니’들은 여자들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왓 위민 원트>에선 여자들의 속마음을 읽는 남자가 나온다. 잘나가던 광고기획자인 닉(멜 깁슨)은 강력한 구매력을 지닌 여성 고객을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여자 동료 달시에게 승진기회를 뺏긴다. 하지만 그는 욕실에서 감전사고를 당하면서 여자들의 속마음이 환청으로 들리는 초능력을 얻고, 그 능력을 이용해 여자들의 환심을 산다. 남자 중심의 세계에서만 살던 그가 어느 날 ‘언니’의 세계로 내려와 여자들과 수다를 즐기고 그들의 코드를 이해하게 되자, 경쟁자인 달시마저 마음의 빗장을 연다.
‘남자 언니’들의 특징은 주로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할 때 조화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방송사 PD인 박아무개(29)씨도 제작팀 안에서 불리는 공식 호칭이 ‘언니’다. 그와 일하는 한 작가는 “연출팀 중에서 가장 친하다. 다정다감하고 이해심이 많아서 아이템을 정하거나 스케줄을 짤 때도 대화가 잘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도 상의해 보완해가기가 수월해 일의 시너지 효과가 높다. 다른 남자들도 이처럼 ‘언니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평했다.
‘언니주의’는 ‘오빠주의’를 뒤집고자 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대학생 박이헌(21)씨는 “여자 후배들이 남자 선배들한테 쓰는 ‘오빠’라는 호칭에는 오빠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환상이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오빠들은 윗자리에 서서 여동생들을 지켜주고 돌봐준다. 오빠의 헌신은 달콤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사랑이다. 언니는 오빠처럼 지휘하고 압도하려 하지 않는다. 언니는 섣부른 개입보다는 어려움을 들어주면서 은근히 뒤를 챙겨준다.
언니와 오빠가 대등한 꿈을 꾸게 하자
남자들끼리 서로 언니라고 부를 때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고 있는 조약골(32)씨의 경우 모임 안에선 성별·나이차를 불문하고 언니라고 부른다. “98년께부터 출판·음악 등 문화게릴라로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남자들끼리도 자주 언니라고 불렀다. 당시 평등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호칭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고안해낸 것이 언니였다.”
‘언니주의’는 점점 남녀가 평등해지는 사회에서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이 만나는 자리에 있다. 씩씩하고 용감한 ‘여자 언니’, 부드럽고 섬세한 ‘남자 언니’가 많은 사회는, ‘언니’와 ‘오빠’가 좀더 대등한 꿈을 꾸는 곳일 게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TV생중계로 토론회를 통해 강금실 법무장관은 여성들이 본받을 만한 새로운 ‘언니상’으로 떠올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보통 어린 동생들에겐 언니가 거울이다. 언니의 말과 생각을 따라하며 큰다. 언니라는 호칭에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앞서간 역할모델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강 장관의 경우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생생히 전달되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고생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감성대를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언니라는 말이 이처럼 항상 긍정적인 맥락 속에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흔히 언니라는 말을 주고받는 곳은 옷가게·미용실·음식점·카페 같은 곳이다. 나이 많은 여자 손님도 자기보다 훨씬 어린 백화점 점원에게 언니라고 부른다. 식당에 온 20대의 여자도 어머니뻘 됨직한 이에게 “언니, 여기 주문받으세요”라고 말한다. ‘언니’는 서비스를 주고받는 곳에서 마땅히 서로 부를 말이 없을 때 대충 쓰는 호칭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언니’가 여자들끼리만 쓰던 말은 아니었다. ‘싸나이 중의 싸나이’ 임꺽정도 언니였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선 동생뻘 되는 의형제들이 ‘꺽정 언니’란 호칭을 쓴다. 당시엔 남자들끼리 서로 부를 때 ‘형’ 대신 ‘언니’라는 말을 썼다. 이후 ‘언니’가 여자들끼리 쓰는 말로 굳어지면서, 이 말이 혈연으로 맺은 자매관계를 넘어서자 여자 고객과 여자 점원 사이에 쓰이는 비공식적인 호칭으로 자리잡았다. 이때 ‘언니’들은 주로 폼나지 않는 곳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를 굽혀 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그동안 여성들이 권력을 쥔 힘있는 자리에 서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객과 점원 사이에 쓰이는 ‘언니’는 여성의 취약한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셈이다. 홀대받는 여성의 호칭에서 평등의 기호로

사진/ <왓 위민 원트>에서 마초이자 성공지상주의자였던 닉(멜 깁슨)은 우연한 사고로 여자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얻어 새 인생을 살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