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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발자국엔 우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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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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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발자국 추적자의 자전적 야생체험기… 자연의 신비 탐험하며 영혼의 깨달음 얻어

<숲에서 만난 발자국> 톰 브라운 지음, 김훈 옮김, 황금가지 펴냄, 1만3500원.
새엄마의 미움을 받고 숲 속에 버려진 헨젤과 그레텔은 숲으로 가는 길에 떨어뜨린 조약돌들을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 조약돌은 어린 두 남매에겐 숲을 빠져나와 마을로 가는 ‘길’이자 ‘지도’였다. ‘동물 발자국 추적자’(The Tracker) 톰 브라운은 꼬마 때도 조약돌이 필요 없었다. 그에겐 동물들의 발자국이야말로 ‘길’이자 ‘지도’였다. 하지만 이 발자국은 문명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되는 길이었다. 톰 브라운이 1978년 쓴 <숲에서 만나는 발자국>은 소년시절부터 20여년에 걸친 자전적 야생체험기다. 이 책은 공해로 찌든 도시에서 유약한 존재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험하고 무섭지만 동시에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자연의 맨얼굴을 만나게 해준다.

20여년 동안 만난 수많은 동물들

사진/ 젖은 모래밭을 뛰어간 흰꼬리사슴의 발자국
그가 자연에 매료된 것은 어릴 적부터 살았던 미국 동부 뉴저지주의 ‘파인 배런즈’란 숲 덕택이었다. 그는 깊숙한 숲 속까지도 자기의 ‘뒷마당’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는 이곳에서 일곱살 때 할아버지 ‘뒤를 밟는 늑대’와 그의 손자 릭을 만난다. 자연과 자연의 발자국을 좇는 아파치 인디언 ‘뒤를 밟는 늑대’는 백인들이 강제 이주령을 내리자 자연 속으로 숨어들어간 은둔 부족의 일원이었다. 19세기 말엽 어린아이의 신분으로 인디언의 지혜를 전수받은 ‘뒤를 밟는 늑대’는 자신이 배운 방식 그대로 톰과 릭을 훈련시킨다. “학교는 내게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할아버지는 내게 배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톰과 릭은 발자국을 살피며 그 발자국의 주인공이 어떤 동물인지, 그 동물은 어떻게 걸음을 멈추고, 어떤 자세로 휴식을 취했는지, 다리를 어떤 자세로 놓았는지를 알아나간다. 엎어진 돌, 나뭇가지에 걸린 한 움큼의 털, 제 자리에서 벗어난 사물들처럼 희미하고 모호한 자취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자취들이 주는 인상을 통해 그 동물은 거의 손으로 감촉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고정된 모습으로 내 앞에 떠오른다.” 어린 소년들은 이렇게 발자국을 좇아 회색곰·사슴·들개·너구리·밍크·코요테·스컹크·수달 등 수십 가지 동물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난다’.

이들이 얼마나 동물 발자국 추적에 홀려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이들이 발자국 추적 훈련장소로 가장 좋아했던 곳은 푸줏간 현관 앞이었다. 이곳은 결코 바짝 마르는 법이 없는 무른 흙이 채워진 맨땅이어서 수많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톰과 릭은 그 흔적만 보고도 발자국의 주인공이 ‘다친 지 2주일쯤 되는 절름발이’인지 ‘팔자걸음으로 걷는 뚱뚱보 아저씨’인지를 알아맞힌다.


추적자가 된다는 것은 발자국을 통해 여러 정보를 파악하는 것 외에도 슬리핑백이나 음식, 성냥, 무기가 없어도 인적 없는 황야에서 홀로 살아남는 능력을 의미한다. 소년은 온몸을 빨아들이는 듯한 뻘에서 헤쳐나오는 법을 체득하고, 굶주린 들개에 쫓겨 3일 동안 나무 위에서 지내다 극적으로 탈출한다. 흰 눈밭에서 여우 발자국을 좇다 실명의 위기도 겪는다.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숲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할아버지는 ‘추위’를 통과제의로 삼는다. 톰과 릭의 옷을 벗겨 눈폭풍이 부는 황야로 내보낸 것이다. “추위는 네 형제이니라. 그런데 너희들은 바람을 적으로 취급해왔다. 너희가 이렇게 벗은 상태로 집으로 간다면, 너희는 다시는 바람의 칼날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팬티바람으로 추위에 떨며 헤매던 톰은 “자연과 하나가 된다면 자연은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귀가에 성공한다. 결국 할아버지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망가뜨리지 않으며 살아가는 법, 우리가 숲에서 얻은 것들을 존중하는 법,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 혼자 남겨진 거친 자연 속에서 외로움을 홀로 이겨내는 법, 우리의 감각과 지식을 확장하는 법, 지금 이곳에 살면서 영원을 이해하는 법, 그리고 그곳에서 생존하는 법”이었다.

문명화를 견디지 못한 야생동물들

사진/ 뻘에 찍힌 황소개구리 발자국.
숲 속에서 ‘어른’이 된 톰이 점차 깨달아간 것은 ‘숲에서 인간은 동물보다 재미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재미없음을 넘어서, 인간은 해악 덩어리이기까지 하다. 톰은 콘크리트 배수관 공사로 미루나무 보금자리를 잃은 비버 일가족이 굶주려 죽은 것을 보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임신한 암컷 사슴을 도살한 밀렵꾼에게는 살의에 가까운 증오를 표현한다. “밀렵꾼 중의 하나가 그것의 뱃속에 자라고 있던 핏덩이를 나무에다 내던져버렸다. 흐르는 듯 유연하게 달릴 때 보면 더할 수 없이 민첩하고 우아해 보이던 그 사슴들이 어떻게 그렇게. 그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데는 몇년의 세월이 걸렸다.” 할아버지와 릭은 지은이가 16살 때 ‘파인 배런즈’를 떠난다. 그는 이때부터 추적자로서 ‘독립된 직공’의 길을 걷는다. 18살 때부터는 ‘파인 배런즈’를 벗어나 그랜드 티턴, 다코타 배드랜드, 그랜드 캐니언 등에서 ‘생존기술’을 시험하는 도보 여행을 4년 동안 계속한다. 그는 여행지 어디서든 나이든 추적자들이나 사냥꾼들, 인디언과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메마른 사막과 거친 협곡을 여행하며,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든 문명화된 것들을 참고 견딜 수 없는 야생동물이 돼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숲이나 황야가 중요한 뭔가를 상실하게 한 적은 없었다. 사실 내가 내 삶에서 진실로 중요한 뭔가를 상실했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거의 항상 숲을 떠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인간은 자기 앞의 신비스러움을 먹으면서 세상을 사는 법이다.” 톰은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신비스러움을 풀어내기 위해선 그 신비스런 대상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 속성상 자신을 보여주기 수줍어하는 자연의 신비를 주목해온 그의 삶은, 그래서 격렬한 모험기임에도 침묵의 지혜가 흘러나온다.

혹시 ‘뒤를 밟는 늑대’의 삶이 궁금한 독자들은 2년 전 번역된 <할아버지>(지호출판사 펴냄)를 보면 된다. 자연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피부색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영혼으로 연결돼 있다고 믿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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