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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추억은 방울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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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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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봄날이라고 반짝 한낮 햇살로 몸을 녹일 뿐 아침저녁 맵싸한 바람 탓인지 옹송거려지는 마음 안고 사는 겨울 반 봄 반의 계절이다. 소음() 심한 영어 소모임에 사무실 내주고 은행일 보러 나온 길에 따뜻한 커피 생각 간절해 서점으로 발길을 놓는다.

하루에 드나드는 사람을 꼽을 수도 없건만 그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한잔 하고 가”라며 시골다방스러운 진한 커피를 건넨다. 새 학기의 북새통을 치른 뒤여서인지 그러잖아도 작은 체구의 그의 얼굴은 마른 잎처럼 파삭해 지쳐보인다.

작은 시골이지만 독서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는 자신의 일터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남편과 서점을 꾸려가는 그는 늘 일에 쫓기고 숨이 차게 살아내고 있다. 바쁜 일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속사포 말투는 여전하지만, 오늘 얼굴엔 왠지 잔잔한 추억이 내려앉아 있는 듯하다.

“세상에, 신문 봉께 나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영광에 있는 고등학교로 오셨지 뭐야, 너무 반가워 전화만 드리고 한번 찾아뵙기로 했는데 여적 못 갔네”라며 한달음에 저간의 사정을 쏘아댄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고3이 돼서야 다시 고향 시골학교로 간 사연이야 잘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3학년을 해남 우수영에서 보냈다는 그는 당시 첫 부임지에서 만난 총각 선생님이 15년을 훌쩍넘어 불혹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신선했나 보다.

인기 많은 선생님이었느냐는 물음에 “첫 부임지에 온 총각 선생님이라 여고생들이 얼마나 놀려먹었겠느냐”라며 슬쩍 피해가면서 삶에서 가장 찬란했거나 소박했던 여고시절을 더듬는 그는 고향마을어디쯤을 쏘다니는 여고생으로 돌아가 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영암 어디에 계시고 또 누구는…”으로 이어진 옛 선생님과 대화를 타고 학교 근처의 바닷가와 연못, 들녘,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을 고향 친구들 음성을 기억해내고 빙그레 웃음지으며 애써 옛 기억들을 들춰본다.


‘얼굴 하얗고, 자그마하고, 둥그런 아이’로 기억하는 선생님이 그를 알아챌까 싶지만 그래도 꽃 한 다발에 맛있는 빵 사들고 마주할 ‘옛’ 선생님과 나눌 ‘옛’ 이야기에 절로 가슴 부푸나 보다.

“같은 도에 살다 보니 이런 행운도 있네” 하며 부러 부러운 소리를 하면서도 작은 인연 하나가 일상에 빠진 그를 들뜨게 하는 마력에 감사할 뿐이었다.

“조금 쉬어가라고, 옆도 보고 자연도 보라”고 볼 때마다 휴식을 권해도 마다하던 그가 오랜만에 가슴에 찾아온 추억여행을 실컷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작은 것에 행복해하고 흠씬 빠질 줄 아는 소박한 마음에 나도 덩달아 웃음 물어진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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