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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백화점식 문화상품점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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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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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뛰어넘는 문화의 즐거움… 둘러보기만 해도 재미있는 전문점의 세계

(사진/인사동 '점'.)
모처럼 만난 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아니면 그냥 울적한 날, 이지만(29·대학원생)씨는 굳이 신림동 집 앞의 레코드가게를 놔두고 홍대앞으로 간다. 큰길가에서 한발짝 물러난 골목 중간쯤에 있는 작은 레코드가게가 이씨의 목적지다. 점원이 건네는 커피 한잔을 마시며 빼곡한 음반을 둘러보다보면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맘에 드는 음반이 있으면 사고,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씨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이 가게에 들르는 그 자체에 있으니까. 아트록과 프로그레시브 음반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마이도스가 바로 이씨가 단골로 들르는 가게의 이름이다.

전문성으로 승부하는 점원들

“그냥 유행하는 노래를 사고 싶으면 집 앞에 가면 되죠. 일부러 여기까지 오는 건 제가 좋아하는 종류의 음악만 취급하기 때문이에요.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니까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음악 얘기를 나누고, 서로 좋아하는 음반을 추천도 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유행에 빠지지 않고 저만 아는 독특한 옷가게나 카페에 가는 것처럼 저만의 귀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백화점 대신 전문점. 온갖 것들이 풍성하지 않아도 한 가지, 한 종류만 모아놓은 곳. 이씨처럼 문화애호가들에게 특정한 문화장르의 상품만을 모아놓은 전문점은 그 자체로 재미다. 찾아가고, 고르는 것만으로도 전문점은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와 같은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사지 않아도 눈요기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전문점은 그 자체로 애호가들에게 문화가 된다.

그러나 이런 특정 문화상품 전문점들은 되레 줄어드는 추세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특정 분야의 책을 주로 취급하는 전문서점들이다. 80년대 웬만한 대학교 앞에는 하나씩 있던 사회과학 전문서점들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대학로의 명물 삼련서점이 문을 닫았을 때는 중문학도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최후’라는 말이 돌았다. 10만여권의 책을 비치했던 삼련서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중국관련 서점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큰 중국 서점이었다. 대륙에서도 중국학자들이 책을 사러 오기도 했고, 국내 동양화단의 거물들이 단골로 찾아오던 문화적 명소였지만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삼련서점의 폐점을 ‘아름다운 최후’로 부르며 아쉬워했다. 다른 전문점들도 마찬가지다. 과거 특정 장르 문화인들이 자기집처럼 드나들던 많은 전문점들이 사라졌다. 광화문과 신문로에 밀집해 있던 레코드점들은 모두 집세와 재개발에 밀려 사라졌고 광화문 거리는 썰렁하게 패스트푸드점만 남은 비문화의 거리가 돼버렸다.

그러나 이런 전문점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90년대 들어 오히려 새로운 전문점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장르가 다르고 업종이 달라도 모두 그 정서는 하나다. ‘장사’를 뛰어넘는 문화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전문점은 보통 가게에서 느낄 수 없는 재미와 역할을 지닌다. 꼭 그 분야에 종사하지 않아도, 그 분야에 관심이 없어도 한번 찾아가 보면 어떨까. 가게를 가득 채운 상품만 둘러보는 것도, 뭘 살까 두손에 들고 지갑 사정을 가늠하는 것도 다 전문점의 재미다. 전문점에 가는 것은 또한 문화와 만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주로 서점과 음반가게가 중심이 되는 이런 전문점들의 특징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전문성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가도 말만 하면 척척 찾아주는 점원들의 ‘내공’이 기본이기 때분이다. 평론가나 전문가도 모르는 현장에서 갈고 닦은 지식들이 이들의 무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일반 가게에서는 볼 수 없는 주인과 손님의 인간적 교감도 전문점들의 매력이다.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뒤적여도 잔소리가 없다. 눈치가 뵌다면 이미 전문점으로서는 실격이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정보를 얻고, 없으면 주문해서 원하는 품목을 손쉽게 살 수 있는 곳. 장르별로 이름난 전문점에 한번 가보자.

유명 음악인, 만화가들도 단골

(사진/인데코(맨위).한양문고)

서울 홍대앞의 아티누스(02-326-2326)는 가장 대표적인 전문서점이다. 미술의 메카 홍대앞에 있는 만큼 미술과 영상에 관한 책들이 이곳의 주종목이다. 국내 미술서적은 부족해도 외국 수입미술책만큼은 1만여종을 국내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유하고 있다. 서점인 동시에 갤러리이자 아트숍, 카페가 곁들여져 있어 그저 커피만 마시기에도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미술 잡지부터 영화전문지까지 다양한 종류의 잡지를 구해볼 수 있는 점도 특징이다. 역시 미술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울 인사동 인데코서점(02-734-7254)도 약 1만여권의 외국 미술서적이 가득한 미술 전문서점. 손님이 많지 않아 처음 가면 쑥스러울 수도 있지만 몇 시간이고 보고 그냥 가도 상관없다. 순수미술부터 공예, 건축, 사진 등 쉽게 보기 힘든 화보집들이 많아 외국책이어도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홍대앞의 또다른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한양문고(02-338-5210)는 만화에 관한 국내 최고, 최대의 전문서점으로 늘 만화팬들이 북적이는 곳. 김의영 사장과 노귀숙 실장 부부가 6년 전 문을 열었다. 매장에만 20여만권의 만화책을 비치해놓았고, 총판까지 합치면 무려 40여만권을 보유하는 초대형 만화서점으로 시중보다 20% 싼값에 만화를 판다. 절판된 만화도 주문만 하면 거의 대부분 구할 수 있다. 매장 직원 5명은 대한민국에서 만화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만화도사들로, 하루 평균 30∼50권의 새로 입고된 만화책을 모두 읽기 때문에 제목이나 작가 이름만 대도 척척 찾아다 준다. 황미나, 양경일씨 등 만화가들도 단골이어서 신간이 나오면 작가친필 사인 만화책을 특별판매하기도 한다. 만화와 함께 수천여종을 구비한 무협지도 국내에서 가장 전문적으로 취급하기로 유명하다.

서점처럼 전문매장이 분화한 업종은 바로 음반가게다. 이지만씨가 단골인 마이도스(02-322-6697)는 유럽의 아트록과 프로그레시브 록밴드들의 희귀음반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시완레코드의 직영점이다. 지난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가 집까지 찾아오는 고객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문을 열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한 열혈고객의 도움으로 최근 새 단장을 한 이곳에는 5500여종의 음반이 구비돼 있다. 외국인 고객들이 많기로도 유명해 음악을 좋아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마지막 관광코스에 들어갈 정도다.

(사진/헤비메탈·힙합음반 전문점 '상아레코드'(맨위).클래식음반 전문점 '뮤직라이브러리')

압구정동의 터주대감으로 15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상아레코드(02-548-0187)는 헤비메탈 마니아에게는 잘 알려진 메탈 음악전문점. 주말이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고객들로 북적였지만 올 1월 인터넷 통신판매(www.sangarecords.co.kr)를 시작한 뒤로는 다소 여유로워졌다. 힙합음악을 부전공으로 살려 1500종 이상의 힙합음반도 갖추고 있다. 신해철이나 이현도, 노바소닉 등 음악인 단골이 많다는 것도 이 가게의 특징. 이 가게의 또다른 강점은 한 가수의 ‘모든’ 음반을 다 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싱글앨범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앨범이라도 미국에서 나온 정규앨범과 달리 보너스 트랙을 몇곡씩 담고 있는 유럽 버전과 일본 버전이 모두 구비돼 있어 마니아들의 ‘편집증(?)’을 만족시킨다. 매장에 없더라도 원하면 지구상에 있는 어떤 음반이라도 구해온다는 것이 상아레코드의 모토다. 최근에는 80년대 가짜목소리로 팝음악계 최악의 스캔들을 일으켜 미국 시장에서도 멸종된 밀리 바닐리의 음반을 유럽에서 공수해와 한 고객을 감동시켰다.

클래식 음반의 경우 신나라레코드나 타워레코드처럼 대규모 매장이 물량면에서는 최고를 자랑하지만 압구정동의 뮤직라이브러리 본점(02-511-0025)에 가면 다른 즐거움을 맞볼 수 있다. 40종 가까이 꽂혀 있는 베토벤 9번 교향곡 가운데 어떤 걸 골라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초보 손님이라면 종업원의 친절한 안내로 지휘자별 특징을 들으면서 클래식 입문의 안내를 받을 수 있고 고수라면 박학한 종업원들과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면서 해외 연주자들의 근황까지 들을 수 있다. 대형매장들과 비교해도 물량이나 마이너 레이블들에 대한 구색까지 빠지지 않아 음악전공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색다른 기념품을 찾으려면?

(사진/가나아트(맨위).아니투스)

최근 늘어난 문화상품 전문점으로는 미술작품과 관련된 기념품이나 아트상품을 파는 아트숍을 빼놓을 수 없다. 음반이나 미술서적 전문점들이 초심자 수준 이상의 심도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미술상품을 파는 아트상품점들은 반대로 초심자들이 어려워 보이는 미술의 향기를 좀더 쉽게 생활에 접목시켜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인사동에 있는 가나아트 인사아트센터의 두 아트상품점이 요즘 ‘뜨는’ 아트상품 전문점들. 이곳 1층의 가나아트 직영점(02-734-1020)은 기존 인사동 다른 아트상품점들에 비해 훨씬 넓고 상품도 다양해 인사동을 지나다가 아이쇼핑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반면 같은 건물 4층에 입주한 한국공예문화진흥원 직영점인 ‘점’(02-733-9042)은 다양한 분야의 공예상품들만을 판다. 국내 작가 100여명이 전통적 디자인으로 만든 그릇부터 액자, 접시, 소반까지 가격은 1만원부터 수십만원대까지 100여종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2m 높이의 이집트 조각이 서 있는 서교동의 BMF(02-325-3823)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전시관에 가까운 프랑스 예술상품전문점. 프랑스 국립박물관연합 한국지사인 BMF에 들어가면 우선 루브르, 올세이, 퐁피두 등 프랑스의 대표적인 박물관에서 직접 제작한 복제조각품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 사진 속에서만 보던 40여종의 크고 작은 조각품들은 복제이기는 하지만 한정제작하는 예술품들이다. 2만5천원짜리 프랑스 명화 포스터도 인기품목. 그외에도 나폴레옹과 조세핀이 사용했다는 크리스털 술잔, 독특한 장신구와 시계 등 보는 것만으로 즐거운 기념품들이 가득하다. 프랑스의 전시회 도록과 화집, 미술전문서적 등도 많아 전문가와 프랑스인들이 많이 찾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10년간 교수생활을 했던 주인 홍성일씨와 고객들이 불어로 대화하는 풍경에 주눅들어 들어가기를 망설일 필요는 없다. 알고 보면 전화번호부나 노트 한권 사러오는 대학생들도 빼놓을 수 없는 단골이기 때문이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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