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영화에서 탈권위 내세우는 아버지의 초상… 우아한 노년을 맞이하려는 성숙함을 채울 수 없나
텔레비전에선 보기 드문, 팬들의 ‘숭배’현상까지 일으킨 문화방송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 심상찮은 기미가 엿보였다. 복수의 아버지(신구)는 처음에 무능한 폭력남편이었다. 복수가 어렸을 때, 술독에 빠져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 이혼하고, ‘3년만 참아라, 돈 많이 벌어온다’며 복수를 고아원에 맡긴 아버지였다. 그런데 다 자란 복수가 소매치기가 됐건만 아버지는 아주 살가워졌다. 복수가 사온 붕어가 죽자 무덤에 십자가를 만들어주는 다정다감함을 보여주더니 아들이 꿈을 버리지 말라며 사다준 화구(아버지는 본래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로 양복 입은 복수를 번듯하게 그려놓고는 흐뭇해하는 섬세함까지 보인다. 주인공 청춘들의 ‘쿨’한 매력에 빠진 팬들은 그 열광의 도가니에 복수의 아버지까지 포함시킬 만큼 아버지는 은근히 멋졌다. 그런데 이 아버지, 맘이 너무 약하다. 복수가 뇌종양으로 죽게 됐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가 먼저 약을 먹고 세상을 떠버렸다. 강한 아버지라면(보통의 아버지라도) 아픈 아들을 간호하면서 든든한 힘이 돼주는 게 지금까지의 상식에 맞다(오죽하면 신구씨가 이런 설정에 대해 제작진에게, 특히 인정옥 작가에게 거세게 항의했겠는가). 아무튼 이 장면은 ‘약해진 아빠’의 초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혈기 버리고 약한 모습 드러내
최근 종영한 SBS 일일극 <대박가족>의 아버지(임동진)는 더 적나라하게 약해졌다. 귀신잡는 해병대 출신에 전직 경찰관이건만 유치원 원장인 아내(선우용녀)에게 꼼짝도 못한다. 아내가 새 차 뽑아준다고 약속해서 큰 기대를 품고 온갖 수발 다 들어준다. 그런데 아내가 사준 새 차는 유치원 버스였다. 경제권을 아내가 쥐고 있기에 뭐라 말대꾸할 수 없다지만 그가 매우 사랑하는 딸에게조차 서러움을 곧잘 겪는다. 둘째딸 미라한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빠, 심심하면 내가 놀아줄까”였다. 그런 미라가 남자친구 민이를 준다며 라면을 끓이는데, 아버지는 그 라면이 자기 건 줄 알고 기다리다가 민이만 주자 한 젓가락 빼앗어 먹다 미라한테 혼구멍이 난다. 최불암으로 대표되는 ‘존경스러운 한국적인 아버지’나 김수현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독단적인 리더형(이순재처럼)과는 영 딴판이다.
미국이라고 다를까 잭 니콜슨의 명연기에 빛나는 <어바웃 슈미트>(3월7일 개봉)에서 아버지는 진지하게 망가진다. 보험회사 중역으로 빛나는 삶을 사는 듯하건 슈미트(잭 니콜슨)는 66살이 되자 어찌해볼 도리 없이 퇴직에 이른다. 그런데 갑자기 절대 고독에 가까운 무력감과 단절감에 휩싸인다. 자기 자리를 차고 들어온 새파란 후임자가 자문역이라도 해주려는 자신을 철저히 깔아뭉개는 것이야 자본주의의 엄연한 현실이라고 치자. 사랑스러운 가족은 자신의 존재근거가 돼주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먼저 이승을 하직한 아내의 유품에서 친구와의 불륜증거가 쏟아져나오질 않나, ‘난, 귀엽기만한 제니 덕에 산다’고 되뇌게 하던 딸은 자신의 삶에 끼어드려는 아버지에게 급속히 냉랭해진다. 하긴, 귀한 딸이 벌써부터 머리가 벗겨지고 몸이나 사고방식은 어딘가 구부정한데다 물침대 외판원으로 일하는 작자에게 시집가겠다니 말리고 싶기도 할 것이다. 결혼을 왜 중단해야 하는지 강변하던 아버지는 놀라움과 증오로 가득 찬 딸의 눈앞에서 단숨에 제압당한다. 그렇다고 약해진 아버지를 불쌍하게, 또는 자존심 상하게 볼 일은 아니다. 사회적·경제적으로는 젊은이에게, 아내에게 뒤처질지언정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유능’해질 수 있다. 바야흐로 마초적 독단보다 여리지만 다정다감한 감성이 더 큰 매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지 않은가. 문화방송 주말극 <맹가네 전성시대>는 종영으로 치달을수록 무능한 아버지 맹대풍(임현식)을 멋스럽게 만들어 갔다. 처음에 그는 친구 보증으로 집을 잃어도, 친구 도와준다며 유일한 생계원이던 트럭을 날름 팔아놓고도 걱정하는 아내(나문희)에게 “어디 남자 하는 일에 아녀자가 끼어들어, 잠자코 있지 못해”라며 큰소리만 떵떵 치는 인물이었다. 20년이 흘러 맹대풍은 강한 생활력으로 집안을 이끌어온 아내의 위세에 눌려 찍소리조차 내기 힘들게 됐다. 하지만 이후 자식에 대한 사랑과 속깊음을 간간이 드러낸다. 큰딸 금자(채시라)가 두 번째 결혼까지 파탄내고 집에 돌아와 이혼했다고 보고하는 장면이었다. 금자는 “아빠 딸이니까 일단 믿어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줘. 아빠는 남자잖아”라고 하자 맹대풍은 “남자는 그냥 척들 하는 거야…” 하며 안타까움과 애잔함을 넌지시 표현했다. 또 둘째딸 은자(최강희)가 의사집에 가서 온갖 구박을 다 받자 사위를 불러놓고 반듯하게 말한다. “자꾸 그러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은자 그냥 우리집에 확 데려올 거야. 지금이 무슨 이조시댄가 시집갔다고 그냥 그집 귀신 되란 법은 이제 없어.” 진정한 인생은 중년 이후부터다
그런데 멋진 아버지가 되려면 뭔가 좀더 필요해보인다. 매력 있는 중년으로의 성숙이 동반돼야 하지 않을까. <중년 이후>(리수 펴냄)란 책에서 지은이 소노 아야코는 중년의 본질을 온전히 체득했을 때 멋진 향기가 풍겨나온다고 말한다. 그는 중년 이후에 비로소 진정한 인생이 펼쳐진다고 보는데, 과학적 근거는 이렇다. 체력지수는 하강하고 정신지수는 상승하는데, 두 선이 어딘에선가 만나는 교차점이 중년의 시작이며, 그때 인간은 육체의 쇠퇴와 더불어 인생의 본질을 발견하는 재능이 솟아난다는 것이다. 그 재능은 “누구나 어릴 때 또는 청춘시절에 불행이나 탈선 등의 영향으로 상처받으며 성장하지만, 그런 아픈 상처를 스스로 없애버리고, 자신의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며, “이 세상에서 신도 악마도 없는 단지 인간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해준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에 견줘보면 젊은 시절의 열정적 사고나 행동은 즉자적인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포용할 넉넉한 품 없이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는 건 요원해보인다. <어바웃 슈미트>에서 슈미트의 실패는 그래서 예정돼 있었는지 모른다. 중산층에 걸맞은 부는 쌓았어도 그의 내면은 허풍과 두려움으로 범벅돼 있는데다 다른 사람과 깊이 소통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중년 이후를 준비하지 못한 슈미트가 허둥대며 깊은 당혹감에 빠져드는 모습은 연민을 자아내지만 사랑스럽지는 않다.
<엠퍼러스 클럽>(3월7일 개봉)의 훈더트(케빈 클라인) 역시 중년 이후는 다소 초라해보이지만 슈미트보다는 나아보인다. 훈더트는 너무 늦게 결혼한 탓인지 아이는 없지만 아내와의 신실한 관계는 슈미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실 그가 키우는 아이들은 수없이 많다. 훈더트는 미국 명문가의 자제들이 모여드는 명문 사립고교에서 그리스와 로마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엄스)이 자기만의 개성을 강조한 자유주의자라면, 훈더트 선생님은 전통과 원칙을 중시하는 순수한 보수주의자다. 보수적 면모를 갖고 있지만 그는 멋지고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풍모를 은은히 풍겨낸다.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과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조화를 이루고, 옳고 그름을 직시해 지킬 건 지켜낸다. 늘그막에 퇴직한 그를 화려한 리조트로 초대해 ‘엿먹이려는’ 옛 제자 세드윅과의 막판대결은 그래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다. 잘나가는 기업의 총수가 돼 정치계에 입문하려는 세드윅은 젊고 혈기왕성하지만 훈더트의 연륜을 당해내지 못한다.
정녕 나이듦을 계속 즐기고 싶다면…
그런데 세상이 정해놓은 나잇값 대신 자신만의 나잇값을 하며 살려면 물질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책세상 펴냄)은 멋진 아버지, 우아한 노년이 되기 위한 중요한 여건을 개인 밖에서 따져본다. “노쇠가 시작되는 나이는 언제나 그 사람이 속한 계급에 따라 다르다. 광부는 50세에 벌써 끝난 인간이지만, 특혜자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80세에도 경쾌하게 지낸다.”
<새는 빈 둥지를 지키지 않는다>(유성호 지음, 미래를 위하여 펴냄)는 노후생활을 행복하게 보려내면 장성한 자녀에게 지나치게 투자하지 말라며 구체적 방법을 조언하지만, 보부아르에 따르면, 이건 굉장히 협소한 계층에게만 유용한 조언이다. 나이듦이 비참해지는 건 없는 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62살의 보부아르가 ‘풍요로움으로 축복받은 나라’ 프랑스에서 절감한 결론은 이렇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 하여금 말년을 빈손으로 외롭게 맞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문화방송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 주인공 복수의 아버지는 아들의 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사진/ SBS <대박가족>에서 전직 경찰관 출신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주눅들고 딸에게 서러움을 겪는다.
미국이라고 다를까 잭 니콜슨의 명연기에 빛나는 <어바웃 슈미트>(3월7일 개봉)에서 아버지는 진지하게 망가진다. 보험회사 중역으로 빛나는 삶을 사는 듯하건 슈미트(잭 니콜슨)는 66살이 되자 어찌해볼 도리 없이 퇴직에 이른다. 그런데 갑자기 절대 고독에 가까운 무력감과 단절감에 휩싸인다. 자기 자리를 차고 들어온 새파란 후임자가 자문역이라도 해주려는 자신을 철저히 깔아뭉개는 것이야 자본주의의 엄연한 현실이라고 치자. 사랑스러운 가족은 자신의 존재근거가 돼주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먼저 이승을 하직한 아내의 유품에서 친구와의 불륜증거가 쏟아져나오질 않나, ‘난, 귀엽기만한 제니 덕에 산다’고 되뇌게 하던 딸은 자신의 삶에 끼어드려는 아버지에게 급속히 냉랭해진다. 하긴, 귀한 딸이 벌써부터 머리가 벗겨지고 몸이나 사고방식은 어딘가 구부정한데다 물침대 외판원으로 일하는 작자에게 시집가겠다니 말리고 싶기도 할 것이다. 결혼을 왜 중단해야 하는지 강변하던 아버지는 놀라움과 증오로 가득 찬 딸의 눈앞에서 단숨에 제압당한다. 그렇다고 약해진 아버지를 불쌍하게, 또는 자존심 상하게 볼 일은 아니다. 사회적·경제적으로는 젊은이에게, 아내에게 뒤처질지언정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유능’해질 수 있다. 바야흐로 마초적 독단보다 여리지만 다정다감한 감성이 더 큰 매력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지 않은가. 문화방송 주말극 <맹가네 전성시대>는 종영으로 치달을수록 무능한 아버지 맹대풍(임현식)을 멋스럽게 만들어 갔다. 처음에 그는 친구 보증으로 집을 잃어도, 친구 도와준다며 유일한 생계원이던 트럭을 날름 팔아놓고도 걱정하는 아내(나문희)에게 “어디 남자 하는 일에 아녀자가 끼어들어, 잠자코 있지 못해”라며 큰소리만 떵떵 치는 인물이었다. 20년이 흘러 맹대풍은 강한 생활력으로 집안을 이끌어온 아내의 위세에 눌려 찍소리조차 내기 힘들게 됐다. 하지만 이후 자식에 대한 사랑과 속깊음을 간간이 드러낸다. 큰딸 금자(채시라)가 두 번째 결혼까지 파탄내고 집에 돌아와 이혼했다고 보고하는 장면이었다. 금자는 “아빠 딸이니까 일단 믿어주고 달래주고 위로해줘. 아빠는 남자잖아”라고 하자 맹대풍은 “남자는 그냥 척들 하는 거야…” 하며 안타까움과 애잔함을 넌지시 표현했다. 또 둘째딸 은자(최강희)가 의사집에 가서 온갖 구박을 다 받자 사위를 불러놓고 반듯하게 말한다. “자꾸 그러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은자 그냥 우리집에 확 데려올 거야. 지금이 무슨 이조시댄가 시집갔다고 그냥 그집 귀신 되란 법은 이제 없어.” 진정한 인생은 중년 이후부터다

사진/ 영화 <어바웃 슈미트>에서 잭 니컬슨이 연기한 슈미트는 66살에 퇴직해 딸에게 진지하게 망가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