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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유령이 선물하는 ‘기억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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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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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아닌 소설가 2인이 보여준 새로운 글쓰기, <유령의 사랑>과 <침묵으로 지은 집>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2월25일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출세작 <관촌수필>에서 쓴 말이다. 선생의 영전에 조문을 다녀온 날 밤, <관촌수필>을 꺼내 읽으며 한없이 쓸쓸한 문체에 먹먹함을 느껴야 했다. 무릇 작가라면 자기가 겪은 기억의 상처를 드러내고자 하는 노출욕망에 시달리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문구 선생은 생전에 단 한편의 가족사 소설을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기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황석영·김원일·이문열·김성동 등과 더불어 이른바 ‘좌익 2세’ 작가군에 속한 이문구 선생의 ‘침묵’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극적인 구성과 서사적인 해체


사진/ 언론인 손석춘이 지은 <유령의 사랑>은 카를 마르크스와 하녀 헬레네 델무트의 사랑을 그린 액자소설식 구성을 통해 이제는 죽은 망령으로 전락한 마르크시즘의 부활을 희구한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3년 전쯤 와병 직전에 가진 필자와의 대담에서 선생은 “더 늙어서 인생을 맑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때, 미화도 폄하도 아닌 붓으로 담담히 써질는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국전쟁 통에 멸문지화의 횡액(橫厄)을 당할 뻔한 참담했던 정신적 외상(Trauma)은 어쩌면 기억 충동과 발화 욕망에 대한 무의식적 미소니즘(Misoneism)으로 작동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최근 우리 소설은 “젊고 미숙하다”는 진단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불륜문학이란 말은 ‘아파트 베란다 문학’이란 힐난에 비하면 차라리 점잖다. ‘작은 이야기’를 통해 ‘큰 세상’을 드러내야 한다는 소설(小說)이란 개념에 내장된 의미들이 자칫 ‘작은 이야기’ 자체로만 통용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는 않다.

이제쯤 서양에서 수입된 소설 개념이나 글쓰기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태도가 요구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되, 우리 소설이 ‘역사’에 둔감해졌다는 것도 한 원인이 된다. 역사(history)란 무엇인가. 역사란 결국 아버지들의 과거를 극화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우리네 굴곡진 삶의 역사에서 뭇 아버지들은 ‘종’(從)이었고, ‘빨치산’이었으며, ‘독재자’였다. 하지만 최근 우리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궁핍의 시대를 살던 ‘남루한 유령’(이동하, <남루한 꿈>, 1998)이든가, 수직적 혈연주의의 확대재생산을 읍소하는 5060세대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예컨대 김정현의 <아버지> 신드롬은 가정(家庭)이란 공간을 이상화하려는 매우 ‘보수적’ 논리를 읍소하지 않았는가.

부재하는 ‘아버지’를 찾는 일은 결국 문학의 고유영역이다. 특히 소설은 내적 외상에 대한 관찰·기억·치유를 특징으로 한 글쓰기로 ‘자아찾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최근 손석춘·조은·장충식·김준성 등 이른바 비전업작가 출신의 작가들이 소설을 쓰는 행위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될 측면이 있다. 특히 언론인 손석춘과 사회학자 조은의 장편소설은 “여기(餘技)적 아마추어리즘 아닌가”라고 치부하기에는 글쓰기 전략과 서사성의 복원의 측면에서 재조명을 받아야 마땅하다.

흥미 있는 점은 손석춘의 <유령의 사랑>(들녘, 2003)과 조은의 <침묵으로 지은 집>(문학동네, 2003)이 성(남성·여성) 정체성에서 비롯한 글쓰기 전략의 차이가 엿보이면서도,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자전적 ‘기억여행’이란 같은 모티브에서 쓰여졌다는 점이다. 손석춘이 대체역사소설(Alternative-History Novel)의 형식을 취한 것에서 보듯 극적 구성에 치우쳤다면, 조은은 소설과 비소설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드는 서사적 해체를 통한 하나의 비선형적 글쓰기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두 작가의 글쓰기는 “부재의 역사쓰기에 대한 채무”(조은, <작가의 말>, 314쪽)를 나름의 방식으로 갚고자 하는 닮은꼴의 작품 의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두 작가의 소설구성의 ‘차이’는 소설의 결말에서 상당한 낙차를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손석춘의 경우 죽은 망령으로 전락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상의 부활을 위한 서사의 구축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면, 조은의 글쓰기는 사건의 극화 없는 ‘문화기술지’(ethnography)라는 <작가의 말>에서 보듯 해체적 저항의 기술(記述)을 통한 기억의 퍼즐 맞추기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우열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잠깐 지적했지만, 이것은 성 정체성의 차이뿐 아니라 언론인과 사회학자라는 직업적 글쓰기의 차이에서도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기존 소설양식에 대한 재성찰 요구

사진/ 사회학자 조은의 <침묵으로 지은 집>은 소설과 비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50년에 걸친 한국 현대 여성사를 그렸다.
손석춘과 조은. 이들은 ‘소설’이란 새로운 글쓰기의 실험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마르크스와 하녀 헬레네 델무트의 불륜에 가까운 사랑(손석춘) 5살에 한국전쟁을 겪은 한 여성의 50년에 걸친 수난의 여성사(조은). 이들 작가가 요즘 유행하는 자서전 형식을 빌리지 않은 채, 소설 형식을 빌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실존의 기원을 찾는 ‘기억여행’의 글쓰기란 아무래도 자아 우위의 진술이 용인될 수 있는 소설 형식을 통해서만 자기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예컨대 “나는 이야기했고 내 영혼을 구해냈다”(<유령의 집>, 204쪽)라든가,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대신 ‘권력에 대한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라는 그의 잠언을 눈을 감고 생각한다”(<침묵으로 지은 집>, 311쪽)라는 각각의 진술은 왜 이들이 소설적 글쓰기를 취했는가를 설명하는 단적인 언술들이다.

두 ‘신예작가’가 보여준 새로운 글쓰기는 기존 소설 양식에 대한 재성찰을 요구한다. 우리 문학은 기존의 소설 형식에 얽매여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같은 작품이 기억의 압축파일을 복원한 ‘우주적 공갈’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지는 않았는가. 약점도 없지는 않다. 카를 마르크스에 관한 <제2부> 액자소설의 과중한 배치와 빨치산 ‘아버지’ 묘사의 상대적 빈곤(<유령의 사랑>)과, 자칫 에세이적 경향으로 흐를 수 있는 억압의 기억에 대한 환기(<침묵으로 지은 집>)는 서사적 지향의 글쓰기 측면에서 볼 때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두 작가가 호명하고 복원한 저 지하의 ‘유령’들은 요즘 소설에서 접하기 힘든 ‘기억의 힘’을 맛보게 한다. 자전적 요소에 지나치게 침윤된 나머지, 자기 발화의 위치를 특권화하지 않는 글쓰기를 전개한다면 이들의 산문 외도가 우리 문학에도 적잖은 활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겠지만, 이 은닉된 망각 충동에 맞서 기억의 내전을 꾀하는 문단 안팎의 글쓰기가 더해져 풍성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설이 죽었다구 잘못된 진단이다.”(<유령의 사랑>, 11쪽 패러디)

고영직/ 문학평론가 gohy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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