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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안순씨네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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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3-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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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메케, 쾨쾨한 나무숯 냄새가 안순씨네 사랑방을 채운다.

오막살이 농가여도 기름보일러 놓는 것이 다반사여서 군불 때는 방구들 만나기 쉽지 않은 터라 나무 태우는 냄새에 연신 코를 벌름거린다.

‘들어서는 곳’이라는 흔적만 있을 뿐 특별히 대문이 없는 안순씨네 앞마당에는 농기구들이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고, 짖기보다 꼬리 흔들며 반기는 누렁이가 한두 마리 눈에 띈다. 한글교실 갈 시간이 넘어섰는데 그제서야 밭에서 돌어온 할아버지와 안순씨는 지각할 폼이다.

마을회관 보일러가 고장난 뒤 몇번 그 집 신세를 진 터라 다른 집으로 공부방 짐을(짐이라야 칠판·연필깎이지만) 옮기기 위해 안순씨 사랑방에 들어서니 옛 살림들이 정겨이 쌓여 있다. 아랫목에 묻어둔 양은밥통·스텐공기·석짝(대나무로 만든 그릇) 등이 잔뜩 윗목을 차지하고 새까맣게 파리똥 달고 선 거울이며, 빛 바랜 사진 담고 매달린 액자며, 연기에 그을린 벽지가 세월의 더께만큼 누래져 있다. 부엌에 발 디딜 틈 없이 쌓아올린 땔나무들은 기름 아까워 전기장판 온기로만 잠을 청하는 온 동네 할머니들을 불러모아 어깨며, 허리를 녹작지근 녹여낸다. 그리고 안순씨네 사랑방은 하루 종일 치매예방 10원짜리 민화투 소리로 세월을 녹여낸다.

안순씨를 안 것은 이태 전쯤인가 보다. 여기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희망가족’ 모임에 막내아들이 참여하면서부터다. 군청이나 복지기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들을 마을에서 찾아보자며 시작한 모임에 76살의 아버지, 신체장애가 있는 어머니와 살고 있던 당시 11살 아들이 함께하면서다. 아이와 만나기 위해 짝을 이룬 회원이 집에 찾아가면서 수인사 정도를 나누었을 뿐인데 한글교실에서 다시 만난 안순씨는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50대 후반인 안순씨는 다리를 못 쓰고, 손과 팔의 힘에 의존해 생활해야 하는 장애가 있다.


전처 자식 2명을 합쳐 9형제의 자식을 낳고 키워내느라 마음고생·몸고생이 얼마만큼이었을까. 할아버지와의 나이 차이도 20살이 넘고 보니 그이의 근심어린 얼굴은 타고난 장애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안순씨는 한글교실에 오는 학생들 가운데 가장 어려도() 학습속도는 늦은 축에 든다. 그래서인지 자존심 무척 내세우며 악착을 부린다. “우리 엄마가 공부한다고 책 들여다보고 있으면 병신이 공부는 해서 뭣하느냐”고 혼내기 일쑤였다며 지금도 원망의 마음이 깊은지 글자 하나하나 짚어갈 때마다 장탄식을 그어댄다.

꽉 닫힌 마음을 한글 하나하나로 풀어내려는 그이의 설움 섞인 한숨을 들을 때마다 예전의 상처에 또다시 생채기를 내는 건 아닌지 조심스러워진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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