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대영화 거장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사실주의 서사 드라마 <갱스 오브 뉴욕>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미국 현대영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건 그의 작품 속에 배어 있는 음습한 사실주의 덕분일 것이다.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 같은 갱영화에서 사람들은 늘 분노·욕정·이기심·비겁함 같은 속성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그들은 친구를 속이고 죽이면서 피묻은 개인사를 쌓아가고 그것들은 하나로 뭉쳐 이루지 못할 욕망의 바벨탑 같은 형상을 이룬다. 갱영화만큼 그 과정을 적절히 보여줄 장르가 없을 텐데, 스코시즈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보라구.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짜 모습이야!’ 누추하고 흉측한 인간의 얼굴을 들춰내긴 해도 스코시즈의 손길에는 애정어린 비애가 담겨 있다. 가정이긴 했으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선 예수조차 세속의 달콤쌉싸름한 쾌락에 한표를 던지지 않던가.
30년 프로젝트로 뉴욕의 살풍경 재현
19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뉴욕 창세기’를 보여주는 <갱스 오브 뉴욕>(2월28일 개봉)은 거대한 서사 드라마의 외투를 입고 스코시즈식 사실주의를 집대성하려는 듯하다(스코시즈는 이 영화를 30년간 준비해왔다!). 멋진 롱코트를 입고 폼나게 벌이는 20세기의 총격전이든 둔탁한 칼과 도끼로 무식하게 충돌하는 19세기의 혈투이든 갱들의 싸움이 갖는 속성은 마찬가지다. 1840년대 초반 뉴욕, 월스트리트의 비즈니스 지구와 뉴욕 항구, 그리고 브로드웨이 사이에 위치한 파이브 포인츠에서 갱들의 전쟁이 벌어진다.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아일랜드 이주민들과 자칭 ‘원주민’으로 부르는 미국인들 사이의 영역 다툼이다.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대표하는 데드 래빗파의 보스 발론(리암 니슨)은 이 전쟁에서 ‘도살광’ 빌 더 부처(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한다.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본 발론의 어린 아들 암스테르담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한다.
16년 뒤 성년이 돼 돌아온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무자비한 폭력과 협박으로 뉴욕을 지배하는 빌을 본다. 도시의 기강이 지나치게 해이해졌으니 본보기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정치인의 지적은 빌이 지정한 시민의 공개 처형으로 나타난다. 암스테르담이 빌의 거대한 권력 내부로 들어가 그의 믿음직스런 수하로 인정받는 전략을 꾀해야 할 만큼 빌은 거대해졌다. 이때까지 영화는 두 흐름에 집중한다. 경찰과 소방관이 앞장서 약탈의 물꼬를 터주는 지옥도 같은 뉴욕과, 빌과 암스테르담의 관계가 부자지간처럼 기묘하게 ‘진화’하는 모습의 뒤얽힘이다. 위장한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칼을 집어들고 반역한 아들을 냉혹하게 처벌하는 순간들은 당시 뉴욕의 살풍경과 잘 어울린다. 사실 스펙터클과 긴장과 역설에 대한 기대치에 진정으로 호응하는 순간은 영화 종결부의 한 대목 정도다. 빌과 암스테르담이 자신들의 패거리를 이끌고 결전을 준비할 때, 뉴욕 한켠에서 거대한 폭동이 일어난다.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에 투입되는 병사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징병만으로 보충되고 있었고, 예정된 죽음에 내몰리던 시민들은 성난 군중으로 뭉친다. 진압에 나선 군인들의 대대적 학살이 시작되고, 빌과 암스테르담의 대결은 군대의 거대한 무력 앞에 초라하게 쪼그라들고 만다. 비장미 넘치던 빌과 암스테르담의 표정이 갑자기 날아온 포탄 세례에 영문 모르고 어리둥절해하는 순간은 이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장면이라 할 만하다. 영화 마지막, 19세기 중반의 뉴욕은 단 몇초 사이에 9·11 직전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21세기의 뉴욕은 우아한 재즈와 지적인 연극으로 수놓아져 있지만 최악의 자살테러를 맞이해야 할 만큼 증오에 맺혀 있기도 하다. 빽빽이 들어선 고층빌딩 사이로 여전히 야수성이 떠도는 까닭을 <갱스 오브 뉴욕>은 묵시록처럼 보여준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라는 딱지를 분명히 붙이는 방식으로.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갱스 오브 뉴욕>은 폭력과 협박이 난무하는 19세기 중반 뉴욕을 배경으로 갱들의 혈투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16년 뒤 성년이 돼 돌아온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무자비한 폭력과 협박으로 뉴욕을 지배하는 빌을 본다. 도시의 기강이 지나치게 해이해졌으니 본보기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정치인의 지적은 빌이 지정한 시민의 공개 처형으로 나타난다. 암스테르담이 빌의 거대한 권력 내부로 들어가 그의 믿음직스런 수하로 인정받는 전략을 꾀해야 할 만큼 빌은 거대해졌다. 이때까지 영화는 두 흐름에 집중한다. 경찰과 소방관이 앞장서 약탈의 물꼬를 터주는 지옥도 같은 뉴욕과, 빌과 암스테르담의 관계가 부자지간처럼 기묘하게 ‘진화’하는 모습의 뒤얽힘이다. 위장한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칼을 집어들고 반역한 아들을 냉혹하게 처벌하는 순간들은 당시 뉴욕의 살풍경과 잘 어울린다. 사실 스펙터클과 긴장과 역설에 대한 기대치에 진정으로 호응하는 순간은 영화 종결부의 한 대목 정도다. 빌과 암스테르담이 자신들의 패거리를 이끌고 결전을 준비할 때, 뉴욕 한켠에서 거대한 폭동이 일어난다.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에 투입되는 병사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징병만으로 보충되고 있었고, 예정된 죽음에 내몰리던 시민들은 성난 군중으로 뭉친다. 진압에 나선 군인들의 대대적 학살이 시작되고, 빌과 암스테르담의 대결은 군대의 거대한 무력 앞에 초라하게 쪼그라들고 만다. 비장미 넘치던 빌과 암스테르담의 표정이 갑자기 날아온 포탄 세례에 영문 모르고 어리둥절해하는 순간은 이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장면이라 할 만하다. 영화 마지막, 19세기 중반의 뉴욕은 단 몇초 사이에 9·11 직전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21세기의 뉴욕은 우아한 재즈와 지적인 연극으로 수놓아져 있지만 최악의 자살테러를 맞이해야 할 만큼 증오에 맺혀 있기도 하다. 빽빽이 들어선 고층빌딩 사이로 여전히 야수성이 떠도는 까닭을 <갱스 오브 뉴욕>은 묵시록처럼 보여준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라는 딱지를 분명히 붙이는 방식으로.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