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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매맞는 모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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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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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경연미
‘가정폭력’이 갑자기 어디서 뚝 떨어진 단어인 것처럼 세상이 호들갑스럽다. 스포츠신문에선 로또의 열풍까지 잠재웠다며 야단스럽다.

가정폭력은 늘 있었고 심지어는 살인을 부르는 사건도 심심치 않았건만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야기가 입방아를 타는 게 신기하다.

더 놀라운 것은 젊은 여성들의 반응이다.

“작년 연말 뭔 시상식에서 푹 파진 옷 입고 나올 때부텀 불안하더라니”, “어째 이경실이 요즘 옷 입는 것부텀 쪼깨 이상허데”라며 가해자인 손모씨가 흘린 외도설에 무게를 싣는 젊은엄마들의 반응에는 당황스럽다.

‘외도가 사실인지, 혼자 여행갔다온 것이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까지 우리가 판단할 일인지 우습다. 바람피우거나 혼자 여행가는 사람은 야구방망이로 맞아도 된다는 이야기인지….

그동안 캠페인도 벌이고 지역신문에 수없이 글을 써대며, 영광에서 상담소밥 먹은 지 3년이 다 돼가는 터라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겠거니 하는 기대가 일순간 멎어버린다.

도시보다 상담이란 수단이 낮설고 여성고령인구가 많은데다 인구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터에 상담 건수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농촌의 감춰진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도시 못지 않다.


농촌마을은 ‘남성 중심’의 혈연공동체다. 20여년을 맞고 살아도 며칠 친정집에라도 갔다오면 ‘집나간 여자’ 취급에 곱지 않은 눈길이 꽂히고 동정은 사라진다.

밤새 맞다가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출동한 파출소 순경과는 형님-동생관계인지라 바로 풀려나고 오히려 피해자가 “부부싸움에 뭔 신고까지 하느냐”며 꾸지람을 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기세등등한 남편의 구타는 이어지고….

어린 아들이 공포에 떨다 못해 신고라도 할라치면 어린 아이를 파출소로 불러내 ‘후레자식’ 취급한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아직도 파출소 앞을 지날 때마다 침뱉는 버릇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상담소엔 1년이 넘도록 상담만 하는 피해자들이 많다. 집을 나와도 갈 곳이 마땅치 않고 평생 땅만 파고, 맞으며 살아온 세월 동안 피해여성들에겐 무기력이 깊게 자리잡았다.

심지어는 “나 결혼할 때까지만 참아줘”라며 엄마의 25년 멍자국을 외면하는 딸자식의 호소에 엄마는 모성애()의 환각에 취해 자신이 죽어가는지도 모른다.

상담전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들려오는 가정폭력의 예들은 안타깝다. 가정폭력은 순간의 관심과 흥밋거리가 아니다. 피해자와 자녀들에겐 목숨까지 위협하는 고통이 따른다. ‘가정폭력’에 대한 관심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이경실씨 사건에 편승한 듯해 글쓰는 맛이 영 개운치 않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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