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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하룻밤, 그 매혹적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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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2-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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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터 댄 섹스>의 사랑법에 감전된 젊은 남녀의 ‘원 나잇 스탠드’에 관한 수다

수다를 떨려고 온 이들은 모두 눈이 벌개 있었다. 번역하자면 ‘하룻밤 사랑’쯤이 될 ‘원 나잇 스탠드’가 주제여서는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다들 자기 생업과 관련한 일로 밤을 꼬박 새우고 시사회장에 온 참이었다. 최연수(32·여·회사원), 김영아(32·여·자영업), 원성준(29·남·공무원), 이석형(27·남·학생). 가명을 조건으로 한 이들의 수다떨기 자리는 개봉준비 중인 영화 <베터 댄 섹스>(각본·감독 조너선 테플리츠키)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남녀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남자가 사흘 뒤에 외국으로 떠난다는 말에 서로 흑심을 품는다. 부담 없이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는 조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하룻밤이 지난 뒤 이틀 간의 ‘연장전’이 이어지더니 이들의 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한다. ‘원 나잇 스탠드’란 소재는 성을 둘러싼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 방정식, 성담론 등을 읽어보기에 적절해보였다. 하지만 수다가 진행될수록 ‘원 나잇 스탠드’는 일반화가 곤란한, 매우 개별적 경험의 세계라는 게 분명히 드러났다.

나도 그런 사랑을 꿈꾸고 있나


##영화는 어땠죠? 도발적이라기보다 착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김영아(이하 김)=영화 속 주인공들이 부럽더군요. 지난 한해 동안 남자친구 없이 지냈는데, 원 나잇 스탠드로 애인까지 사귀게 되는 걸 보니까.

최연수(이하 최)=전 어디나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 걸요. 내가 겪는 현실이나 영화 속 이야기나, 우리나라나 동서양이나, 잠자고 사랑하고 관계 맺는 방식은 다 거기에서 거기구나. 그런 점이 재미있었어요.

이석형(이하 이)=그냥 무난했어요. 어쩌다 눈 맞고 한쪽 집에서 며칠을 보내는 내용이 현실과 별로 다르지 않고. 좀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내가 화려한 섹스신을 기대했나?

원성준(이하 원)=찍는 데 돈이 많이 안 들었겠다 싶더군요.(웃음) 그런데 결말에 대해선 동의가 잘 안 돼요. 건전하고 안전한 길을 선택한 것 같아서. 대부분의 실제 상황에선 그렇게 발전이 안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영화 중간중간은 ‘나도 그랬어’ 하고 공감했지만 말이죠.

##영화 속에서도 처음에 주인공들이 ‘자자고 할까 말까’ 하고 현실적인 갈등을 겪는데, 어떻게 원 나잇 스탠드에 이르게 되나요?

=나는 이 남자를 알고 싶다, 좀더 사귀어보고 싶을 때, 섹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섹스는 서로의 감성과 취향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거든요. 그런데 섹스가 단순히 테스트용인지 아니면 올가미가 될 것인지 잘 판단해봐야 할 텐데, 원 나잇 스탠드 뒤에 그 사람이 독점적 관계를 요구하는 경우라면 계속 자기는 좀 어렵죠.

=난 섹스를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는 건 본능적 욕구 해소에 있어요. 정신적 교감은 다음이죠. 여자친구가 있고 활발한 성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가끔씩 욕구 해소가 안 되면 혼자 투덜거리고 울부짖고(웃음) 그러거든요. 그러다가 하룻밤 사랑을 하며 푸는 거죠.

=만남의 목적이 단지 섹스뿐일 때도 있지만 정서적 교감일 때도 있어요. 문제는 저 사람이 나랑 섹스를 원하는지 어떤지 어떻게 감지하느냐인데.

남녀의 차이 그리고 남녀의 공감

=전 ‘섹스 한번 하실래요?’라고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게 차라리 나아요.

=솔직하게 달려드는 걸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죠. 하지만 스무스하고 은밀하게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면서 섹스에 이르는 걸 좋아하는 여자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사실 내가 맘에 들고,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섹스까지 가는 여정이 어떤 길이 됐든 다 좋아요. 중요한 건 내가 하고 싶어하는가죠.

=남자의 경우에는 상대방인 여성의 액션이 더 중요해요. 여자쪽에서 집에 가기 싫다는 등의 의사를 넌지시 표현해올 때에야 비로소 뭔가 진행할 수 있거든요. 몇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명확한 신호가 있을 때만 행동하자’ 이렇게 됐어요.

=여자가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게 쉽진 않아요.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싫고, 돌려서 말하되 정확하게 자고 싶다는 의사표시는 해야 하니까 엄청 머리를 굴려야 하거든요.

=난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편인데 상대방을 만나는 가장 쉬운 장소가 나이트클럽이에요. 나이트클럽에서 만나다 보면 적당히 술에 취해 대놓고 물어보기 좋아요. 대개 10명 가운데 6~7명은 기분 나빠하면서 돌아서요. 그 가운데 몇몇은 깔깔대며 ‘너 몇살이니’ 하고 되물어오기도 하죠.

=제가 ‘머리를 써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건 이런 일을 겪고 나서였어요. 예전에 채팅하다 번개할 때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가 섹스를 바로 원한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대학원생이던 남자와 즐겁게 얘기하고 돌아가려는데, 그 남자 왈 ‘솔직히 난 오늘 엔조이하려고 나왔다’라는 거예요. 정말 당황스럽더군요. 그 뒤로 남자들과 술 마시면 한동안 헷갈렸어요. 새벽까지 함께 술 마시더라도 나는 별 생각 없는데, 남자가 오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버스 끊겼다라는 이야기를 남자애들이 어떤 신호로 해석할지 걱정도 되고. 그 뒤 이런저런 사회 경험이 쌓이자 이 신호와 저 신호를 분별할 수 있게 됐고, 그러면서 혼란이 없어졌어요. 그 전까지는 남자들이 팔을 잡아끌면서 ‘아니었어?’라고 말할 때 참 당혹스러웠죠. 그런 신호 분별법은 어른으로서 익혀야 할 필수교양과목이 아닐까요?(웃음)

하룻밤 신호 분별법 체득은 필수

##어찌 보면 원 나잇 스탠드에 이르는 단계보다 이후의 상황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원 나잇 스탠드의 목적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 전 원 나잇 스탠드한 상대랑 대부분 연락하고 지내요. 고민도 이야기하고 생일날 선물도 주고받으면서.

=나는 처음부터 섹스를 전제로 하고 들어가니까 뒤가 더 깔끔한 것 같아요. 물론 섹스만 하고 헤어지는 경우는 없었어요. 함께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굳이 특별한 약속 없으면 함께 쇼핑도 하고 영화도 봐요. 그러다가 상대방이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서야 연락처를 건네요. 이러다 보면 꼭 사귀지 않더라도, 누나-동생, 오빠-동생처럼 친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폭넓은 이성관계를 맺는 방법이랄까. 그런 면에서 사후처리가 굉장히 중요하죠. 섹스 뒤에 누가 먼저 쓱 나가버리고 누군가 남겨지면 기분이 얼마나 찜찜하겠어요.

=잠자리가 만족스러웠을 때라야 그 뒤가 이어지는 거죠. 지난해 성관계가 너무 만족스럽지 못해 아예 기획을 해서 원 나잇 스탠드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콘돔 사용문제부터 시작해서 뭔가 계속 껄끄러웠어요. 그냥 하긴 했는데 무척 찜찜했죠. 그런데 그 남자가 그 뒤에 계속 전화를 해오는 거예요. 우회적으로 거절했죠.

=알던 사람들이랑 뜻하지 않게 잔 적이 몇번 있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 대비되는 경험을 했어요. 어느 여름날, 민소매 입고 그 사람 집에서 비디오를 봤어요. 비디오는 전쟁영화였는데… 이상하게 눈이 맞은 거예요. 그런데 끝나고 나니까 이상하게 열받는 거예요. 시원찮으니까.(웃음) 사실 남자를 보면 느낌이 있어요. 기대되는 사람이랑 기대할 게 없는 사람으로. 그 친구한테는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실망스러웠어요. 그 뒤 걔가 ‘이제 어떡하지?’라고 말하기에 이랬죠. ‘뭘 어떻게 해? 그냥 제자리로 돌아가’. 그의 인간성, 그간의 관계를 봐서는 발전시킬 소지가 있었는데, 섹스에서 만족하지 못하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그 친구, 그 뒤에도 몇번 사귀어보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계속 거절했어요.

=어떻게 단 한번에 결론을 낼 수 있죠?

하룻밤은 오래 지속될 수 있나

=총체적인 느낌으로 아는 거죠. 섹스는 온몸으로 하는 대화니까. 또 한 경우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섹스해야 할 것 같은 경우예요. 난 남자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상대방 욕구를 해소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난 관계중심적인 사람이라서 몸만 따로 놀지는 않아요. 정신적 교감을 못 느끼면 육체적으로도 불감이 돼요. 어쨌든 분위기상 아주 쿨하게 섹스하고, 쿨하게 아침 지어 먹이고 쿨하게 헤어졌어요. 근데 상대방이 너무 쿨하니까 은근히 기분 나쁜 거 있죠. 한번 잤다고 크게 의미 부여하면 그것도 부담스럽지만, 상대방이 너무 쿨하게 나와도 화가 나더라는 거죠. 결국 상대방 반응에 그리 민감해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 나잇 스탠드는 나의 행동, 나의 감정, 나의 책임이란 문제로 귀결되는 거죠.

=번개섹스일 경우, 그리고 너무 욕구불능일 때는 순수 본능의 세계, 암수의 세계로 돌아가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섹스를 통한 정서적 만족감을 원하죠.

=지금 얘기를 해봐도 그런데,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관계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보니까 여자의 눈길이 많이 담겨 있어요. 세미다큐멘터리처럼 별로 조리를 하지 않고, 별 굴곡 없이 흘러가다 보니 밋밋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은데, 여자의 심리묘사에 집중해서 보면 아주 재미있어요. 여기 있는 남자 분들은 다 무난하다고만 얘기했죠? 보는 관점이 다르다니까.

=원 나잇 스탠드를 통한 자아충족? 난해하군요. 전 자기만족을 위해서 해요. 성의 욕구불만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니까. 인간관계를 확립하는 건 그 뒤 문제고.

=인간적인 호감으로 마음의 변화가 온다면, 섹스는 하나의 씨앗일 뿐이에요. 씨앗을 키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고.

=영화에선 섹스가 서로 아주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관계에 변화가 오고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섹스는 성기의 크기, 테크닉의 문제만은 아니에요. 느낌도 중요하죠. 워낙 많은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한 단면만 얘기하기는 어려워요.

=한번 자보면 라이프스타일이 다 드러나죠. 나는 행위 중에 말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말을 많이 시키려고도 하고. 그러다 보면 서로 만족스러운 상황에 들어가기가 좋아요.

=원 나잇 스탠드에 기대하는 내용들이 사람마다 다르네요. 남자들은 한번 섹스로 여자를 만족시켜주면서 ‘나 아직 건재하구나’ 하는 확인으로 자기만족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에 이상한 두려움이 있어요. 나의 욕구는 이렇다라고 표현하면 남자가 겁먹고 사라지는 경우가 있으니까.

=말로 설명해줘도 이해 못하거나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전 야한 그림에서 여성들이 성적 서비스를 받는 그림을 보면 더욱 흥분되는데, 쿠닐링구스 같은 거요. 그런데 남자는 이걸 잘 이해 못해요.

##그런데 하룻밤 사랑이라는 격정의 순간을 보내면 심리적 허탈감이랄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공황상태 같은 걸 겪지는 않나요?

=목적이 뚜렷해서 섹스한 경우엔 육체적 불만족이 아니면 심리적 공황은 없어요. 근데 서로 전제가 다르면 아무리 잠자리가 만족스러워도 나중에 공황에 빠지죠. 특히 관계에 진정성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 그러면 전 관계를 정리해버려요.

=저도 마찬가지죠. 제가 호기심을 느낀 남자가 다른 여자랑 사귀면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독점하고 싶지 않고 독점당하고 싶지도 않은데, 이런 질투심의 공황이 오면 그런 관계는 정리하죠.

=공황? 허탈감? 전혀 없어요. 전제가 뚜렷하니까.

하룻밤 사랑은 필수, 결혼은 선택?

## 원 나잇 스탠드를 해본 경험도 있고, 또 이것에 그리 부정적이지 않은 여러분들이 결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지네요.

=난 33살쯤에 결혼할 생각인데, 결혼하면 원 나잇 스탠드는 안할 거예요. 가만,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결혼하면 이혼은 절대 안할 겁니다. 남자가 능력이 있으면 행복한 가정을 꾸려갈 수 있으니까.

=결혼이오? 전, 별 생각 없네요. 결혼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안 되기 때문에.

=결혼제도를 찬성하지는 않지만, 결혼은 꼭 해보고 싶어요. 아니면 이혼하면 되니까. 결혼제도가 비합리적인 거라고 피해가고 싶진 않거든요.

=실은 난 한번 결혼했어요. 결혼 전엔 이혼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결혼 전에 워낙 두려웠거든요. 이혼 사유가 남자의 바람기와 돈 문제였어요. 지난해 처음으로 남자친구 없이 혼자 지내본 건데. 비로소 독립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독립하는 계기가 됐다고 할까. 혼자 사는 생활에 탐닉하면서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게 부담스러워졌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다른 이에게 눈이 가게 마련인 것 같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없는 면들에 눈길이 간다는 거죠. 그런 갈등을 생각하면 더 어려워져요. 그래서 다시 결혼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진행·정리=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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