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기다린 국내외 예비 흥행대작들… 한국영화 vs 외국영화, 로맨스 vs 비로맨스
명절이 찾아오면 토산품이 시장에서 귀한 대접을 받듯 한국영화도 제 물을 만난 것처럼 기세를 높인다. 물론 명절 대목을 노리는 외국영화도 만만치 않다. 이번 설 연휴에는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이 한달 넘게 이어간 박스오피스 정상의 후속타를 겨냥해 한국영화와 외국영화가 대단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4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한석규의 <이중간첩>,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곽재용 감독이 내놓은 또 하나의 코믹 신파 멜로 <클래식>이 한국영화의 대표선수라면, 이른바 5세대 감독을 대표하며 중국정부와 몹시 불편한 관계에 있는 장이모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무협극에 데뷔한 <영웅>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말쑥한 천재 사기꾼으로 둔갑시킨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경쟁자로 나섰다. 마치 ‘네개의 탑’을 이룬 꼴인데, 이번 설 극장가를 로맨스 있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구분해보는 건 또 다른 흥미를 준다.
<이중간첩> 명성에 맞서는 ‘엽기 클래식’
애초 <이중간첩>의 인민군 소좌 림병호가 풀어놓을 시대적·실존적 고뇌는 설 연휴의 최대 강자로 예상됐지만, <클래식>의 매우 고전적인 로맨스가 뜻밖의 복병으로 떠올랐다. <엽기적인 그녀>가 아시아 시장을 뒤흔들고 할리우드의 리메이크까지 예약하자 곽재용 감독은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펼친 ‘엽기적 신파’를 용기 있게 확대개편했다. 그래서 나온 <클래식>은 언뜻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나 조승우의 깔끔한 연기호흡과 ‘신데렐라’로의 등극을 알리는 듯한 손예진의 매력에 힘입어 인화성 높은 폭발력을 갖춰버렸다.
손예진은 젊었을 적 어머니 주희와 그의 딸 지혜를 1인 2역으로 해냈는데, 좀더 눈길을 잡아끄는 건 첫사랑을 펼치는 주희쪽이다. 어머니의 첫사랑은 그의 정혼녀를 대신해 편지를 써준 고등학생 준하(조승우)였다. 그런데 지혜의 현재와 주희의 이런 과거는 닮은 꼴이다. 대학선배 상민(조인성)을 좋아하는 지혜(손예진)는 적극적인 친구 수경의 부탁을 받고 연애 이메일을 대신 써주는데, 엉뚱하게 이 편지로 상민과 수경이 연인으로 연결된다. ‘편지 대필자’ 지혜는 상민과 연결될 틈이 보이지 않지만, 어머니 주희는 처음부터 또 다른 대필자 준하와 멋진 추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준하가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 삼촌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요양 중인 주희를 만나 소설 <소나기>를 빼다 박은 듯한 추억을 남기게 된다.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는 건 준하의 둘도 없는 친구가 주희의 정혼자라는 점과 뜻밖에도 박정희 정권의 월남 파병이다. 수십년의 시차를 두고 교차편집되는 두개의 로맨스는 개연성 빈약한 반전을 거듭하며 관객의 애간장을 녹이려 드는데, 결국은 영화의 형식처럼 ‘대를 이어’ 사랑을 이뤄내는 놀라운 마침표를 찍어낸다(직접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마무리여서 지나친 정보유출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공교롭게도 현재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영화들은 <클래식> 같은 코믹 로맨스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좌석점유율 90% 안팎을 기록하며 뒤늦게 승승장구하는 <품행제로>는 불량한 영웅 류승범을 중심으로 임은경과 공효진이 발칙한 경쟁을 벌이고, 임창정의 코믹 연기가 차분해서 더욱 효과를 본 <색즉시공>은 질펀한 성적 농담을 도발적으로 펼치며 이 시대의 리얼리티에 걸맞은 코믹 로맨스를 펼친다. 특이하게도 <품행제로>나 <클래식>은 각각 1980년대와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30대 이상의 연령층에게 짙은 향수를 확실하게 자극해주는 장면들로 풍성하다. 정치적으로 숨막힌 시절에 맞춤하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사랑만을 기억하는 어른들이라면 이래저래 그 결핍증을 대리해소해줄 만한 영화들이다.
로맨스의 외양은 있지만 알맹이는 없네
곤혹스러운 건 <이중간첩>과 <영웅>이다. 이들은 로맨스의 외양을 갖췄으되 실속은 로맨스 없는 영화로 분류하는 게 더 나은 형편이다. <이중간첩>의 ‘결정적 장면’은 한석규가 훌륭하게 다듬어진 나체를 보여줄 만큼 헌신적으로 예의 정밀한 연기를 보여준 대목들일 것이다. 방송사 아나운서이자 고정간첩으로 나오는 고소영과의 로맨스는 취약하기 그지없는데, 이건 남과 북 어느 곳에도 안착할 수 없는 이중간첩의 실존적 고뇌감을 더 강력하게 전염시키기 위한 의도된 선택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비타협적’ 노선이 대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영웅>은 과도한 중화주의에 진시황 같은 독재자에 대한 옹호, 이야기 단락마다 현란하게 색감을 바꿔가는 탐미주의를 위해 로맨스를 희생시킨 경우다. 뒤에 춘추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 진시황이 되는 진나라의 영정은 수많은 무사들의 암살시도를 피해가야 했다. 장천·파검·비설이 특히 위협적인데, 어느 날 미천한 장수 무명이 이들을 모두 처치했다며 영정을 찾아온다. 영정이 그의 무용담을 먼저 청해듣고, 이어 영정이 그의 이야기를 정정하다가 마지막에 진실이 펼쳐진다. 무명의 이야기는 질투를 주제로 붉은색으로 펼쳐지며, 영정의 상상은 희생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펼쳐진다. 질투나 희생이란 구도로 풀어갈 수 있는 건 모두 파검(양조위)과 비설(장만옥)이 연인 사이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장이모식 무협정신이 이들의 비극적 사랑이 전할 법한 극적 감동의 계기를 깨끗하게 탈색시켰다. 영정이 대륙을 통일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무사는 뒤로 물러서야 한다고 ‘갑자기’ 깨달은 파검 때문이다. 비설은 파검이 고집하는 진정한 무의 세계에 대항해 사랑뿐 아니라 목숨마저 잃고 만다. ‘어리석은 비설’과 ‘진정 현명한 파검’의 구도도 그렇거니와 이 때문에 깨지는 로맨스에 감정이입을 하기란 웬만한 ‘배포’가 아니고서는 곤란해보인다. <영웅>이 대만 출신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나 홍콩 왕가위의 <동사서독>만큼 독창적 무협극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중화권 영화인들이 합심한(이연걸·양조위·장만옥·장쯔이 등 중화권 스타들의 총출동, <신용문객잔> <소림축구>의 정소동 무술감독, <현 위의 인생> <패왕별희>의 후오팅샤오 미술감독) 무협 총정리를 복습하는 기분으로 편안하게 볼 일이다.
스필버그도 한국의 설을 기다렸다
‘잡을 테면 잡아봐’(캐치 미 이프 유 캔)라며 기막힌 사기행각을 벌이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를 쫓는 연방수사국(FBI)의 금융범죄 전문가 톰 행크스의 유머넘치는 추격극 <캐치 미 이프 유 캔>에는 이렇다 할 로맨스가 없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믿기 힘든 실화라는 점이다. 프랭크 에버그네일 주니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FBI 역사상 최연소 수배범이었다. 17살부터 5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250만달러에 이르는 위조수표를 만들어 썼고, 조종사·의사·변호사 등 다양한 모습으로 눈부시게 변신하는 데 늘 성공했다. 강박적일 만큼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끼워넣는 스필버그의 버릇은 여전하지만, 누군가를 멋지게 속여넘기는 장면들은 매혹적이다. 로맨스가 끼어들었다면 다분히 사족이 됐을 법하다. 그런데 어린 프랭크가 보여주는 유혹의 기술이나 죄책감 없는 속임수는 매혹에서 돌연 허탈함으로 그 구실을 바꾸고 만다. 프랭크가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위조방지용 수표를 만들었고, 이를 기업들이 널리 사용하면서 해마다 수백만달러를 벌어들여 ‘잘먹고 잘살았다’는 영화 밖 현실을 문득 알려주기 때문이다. 설 연휴에도 굳건히 극장가의 한모퉁이를 지켜나갈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에는 1편보다 강화된 로맨스가 나오지만 진정한 매력은 판타지 스펙터클에 있다는 걸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버렸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영화 <클래식>

영화 <이중간첩>

영화 <영웅>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