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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역 니은 디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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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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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3명의 회원과 함께 5분 늦게 도착한 마을회관 앞에는 하얀 고무신 7켤레와 털신 2켤레가 모여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머니·할아버지·학생들 한방 가득 왁자한 인사를 건넨다.

“선상님! 정월까지만 갤쳐줄라요 고추모 이식만 하믄 그 담엔 괜찮은디….” 동춘이 엄마의 물음에 20개의 눈동자는 ‘이제 재미붙였는데 2월까지만 할 것이냐’고 다그쳐 묻고 있다.

“어매들이 하자고만 하믄 아주 바쁠 때만 빼고 계속 할랑께 걱정 말고 이왕 시작한 거 천천히 편케 맘먹고 해보시게요.”

“그래야제, 고추 딸 때만 빼고 간간이라도 글자 갤쳐줘야 혀.”

서로 다짐말을 놓고서야 책이며 공책들을 펴놓고 옆에 앉은 교사들에게 숙제검사 해달란다.

오늘은 신입생까지 한명 늘었다.

지난주부터 열린 법성마을 한글교실 풍경이다.


군내버스를 탈 때마다 “쩌거이 염산 야월리 차 맞지라” 물어대는 아줌마나 할머니를 볼 때마다 얼마나 답답할까 안쓰러웠었다. 농협에 가면 “미안하지만 내 것 좀 써줘”라며 통장과 도장을 낯선 이에게 내미는 그네들의 부끄러움을 쳐다보기 민망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이가 많으면 부탁하기도 수월하지만 40~50대의 아줌마들은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작저작 눈동냥으로, 깜냥으로 살아온 세월들이다.

어떤 이는 남에게 부탁하기 창피해서 은행 갈 때마다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가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회적 관계가 적어 그나마 기회마저 없었던 농촌 여성들은 “이제사 배워 뭘 하누” 싶다가도 교회 가서 찬송가도 찾지 못해 헤맬 때마다 못 배운 원망만 커졌단다.

‘기역, 니은’ 자신 있게 외우다가도 칠판 앞에만 서면 캄캄해진다는 우리 어매들. 그래도 첫날보다 연필 잡는 폼이나 발표력은 날로 다르다.

78살로 최고령이신 양례할매는 잘 따라하다가도 “할매 이거이 뭐다요” 하고 다가서면 “몰~러”부터 내뱉곤 해 우리를 웃게 만든다.

모음 ㅗ를 배우다가 우리 교실의 오빠가 되어버린 최할아버지는 유일한 청일점이다. 부인과 함께 복습도 철저히 하시는지 하루하루가 다르다.

“진작 좀 할 것을….” 뒤늦은 할머니·할아버지의 한숨 뒤엔 우리 사회의 책임이 크지 싶다.

이제 발걸음 내딛는 할머니·할아버지 학생들의 주름진 웃음 보러 가는 우리 회원들의 재미도 여간 쏠쏠하지 않다.

다음 시간엔 설에 내려올 손주들에게 자랑하시게 이름 석자 크게 쓸 수 있게 가르쳐드려야겠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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