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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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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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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빨간 차 맞아요 차 펑크 났어요.”

상담을 마친 애기엄마가 밖에 나갔다 오더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전해준다.

방문상담 오는 길에 어쩐지 차가 흔들려 불안했는데 나가 보니 뒷바퀴가 푹 주저앉았다.

애기엄마네 사정을 잘 아는 수녀님(우리말이 수준급인 인도 수녀님)까지 모시고 왔는데 아찔해진 내 심정을 알아챘는지 수녀님은 “아직 할 일이 많아서 안 데려가셨나 보네”라며 위로해준다. 난 속으로 불경스럽게도 “수녀님 영빨() 덕이지요”라며 웃음으로 대신하고….

카센터 불러놓고 동네 구경할 겸 나와 보니 옆마을 양로원이 왁자하다. 너덧명의 마을사람들이 10원짜리 고스톱에 정신팔고 있다가 수녀님이 들어서자 화투짝 감추고 발뺌하느라 정신없다.

묘량면에 자리한 이 마을은 한센병 환자와 가족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한센병 환자 공동체마을 가운데 하나라는 수녀님의 설명이 덧붙여진다.

뭉그러진 손으로 어찌 화투짝 잡나 싶은데 외국인 수녀님에게 고스톱이며 뽕도 한판 치자며 너스레를 떨고 처음 본 나까지 잡아끈다. 수녀님은 농담 섞은 표정으로 어깨도 두드리고 손도 어루만지며 사랑을 나눈다. “지금은 약이 좋아져서 아무 상관없어요”라는 말에 한발 떨어져 있는 나는 머쓱해진다.


밖으로 나오자 아침부터 심상찮은 바람이 휘황한 칼바람으로 걸음을 막아선다. 온 김에 동네를 보고 싶어하는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수녀님이 안내를 맡는다. 지금은 40여호 정도가 산다는 마을은 빈집도 더러 눈에 띈다. 많은 집들이 돼지나 소를 많이 키웠나 보다. 주인 잃은 돼지막(돈사)·소막이 집집마다 딸려 있다.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니 오래 전에 지은 듯한 돼지막에서 돼지들이 꿀꿀거린다. 돼지똥을 가득 담은 외발 리어카를 밀며 30대 초반의 젊은 아줌마가 올라오다 “오메 오메 수녀님, 어쩐 일이다요. 오실 날도 아닌디”라며 놀란 맘으로 반갑게 맞아준다. “젊은 사람들이 꾀 안 부리고 늘 열심히 사는 모습이 예쁘다”는 수녀님 칭찬에 예쁘장한 얼굴은 쑥스러움에 달아오른다. 동네사람들의 심부름꾼을 자처하고 열심히 산다는 젊은 부부를 뒤로 하고 동네를 돌아나오자 매섭던 바람도 잦아들었다.

“이 동네 사람들 마음도 몸도 부자가 많아요. 아이들도 잘돼 나가서 제 밥벌이들 해요.” 오히려 우리보다 행복해보일 때가 많다는 수녀님 말에 몸도 마음도 가난한 나는 한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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