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오태석과 채윤일, 그 옹골찬 예술가들이 선보이는 새해 무대
연극동네에도 명망이 있고, 권력이 있고, 이 두개를 지닌 작가들이 있다.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가 지닐 명망과 권력은 작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연극에는 작품의 명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작가의 권력이 존재한다. 이익단체의 감투를 지닌 이들이 한국연극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작품의 생명, 작가의 권위와는 담을 쌓고 산다. 이들의 권력은 명망이 아니라 오명의 산물이다. 내가 오태석, 채윤일을 작가로서 존경하는 바는 이들이 철저하게 자신의 명망과 권력을 작품으로 쌓아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월이 30년을 넘었다.
오로지 작품으로 명망·권력 쌓아
오태석의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2월23일까지 서울 아룽구지극장, 02-745-3967), 채윤일의 <이상의 날개>(3월2일까지 서울 대학로극장, 02-764-6052)를 보고 나면 놀라운 사실 두개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연극하기 어려운 시대에 목숨걸고 연극하는 연출가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공연 속 남자는 늙어가도 여자는 더 강해지는 모습이다. 한국연극에서 오태석, 채윤일 하면 축구 국가대표선수처럼 한국연극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두 연출가는 한눈팔지 않고 어두운 극장에 갇혀 연극만을 변함없이 해왔다는 것과 더불어 연극에 관한 단체에 소속되어 회장이니 임원이니 하는 감투를 쓰지 않은 채 살아왔다는 것을 덧붙여야겠다.
이것은 한국연극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연극 바깥에 있다는 뜻이다. 극단을 운영하면서 극단 바깥의 단체와 떨어져 있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거리야말로 이들이 연극만을 하면서 우리의 삶과 세상을 번역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공덕으로 두 연출가 앞에는 끊임없이 연극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붐비고 있다. 이 젊은이들은 연극이 가난한 예술이라는 것을 잊고, 옹골찬 예술가 앞에서 자신의 허점을 발견하고 고치고 싶은 욕망으로 행복한 이들이다. 오태석은 <앞산아…>란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맡아 공연하고 있다. 이 작품은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전통연희 개발지원 선정작이다. 그러니까 정부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지원했다는 뜻이며, 이 작품은 그 지원 사업에 적절하다는 뜻이다. ‘특별한 목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라지고 있는 ‘기억’이다. 오태석이 이끄는 극단 목화가 발행한 소식지(2002년 12월12일) 앞면에는 “잃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무서운 진실”이라고 하며 제주도 전통놀이 ‘디딤불미’를 알려주고 있다. 기억은 진실의 동의어다. 무거운 진실을 되살리는 오태석의 집념 이 작품은 제주도 사람들이 겪었던 잃어버려서도, 잊어서도 안 되는 1948년 4월3일에 일어난 이른바 4·3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작품은 맥이 빠져버린다. 이미 오래전에도 이 사건을 다룬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산아…>는 4·3사건을 새롭게 다루거나,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공개하지도 않는다. 관객들이 작품을 보기 위하여 극장엘 들어가면 표를 사야 하고,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간 뒤에는 다시 표준어본과 공연극본이라는 두개의 대본을 구입해야 한다. 물론 의무는 아니지만, 표준어본이 없으면 공연을 다 이해하기 어렵다. 작가 오태석은 이 희곡을 제주도 사투리로 썼고, 동시에 표준어로 고쳐썼다. 공연은 제주도 사투리로 한다. 만약 무대 위에 있는 수많은 오브제들과 배우의 연기, 제주도 사람들이 아닌 이들이 등장해서 내뱉는 몇몇 표준어만 없다면 관객들도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미덕은 제주도 사투리를 연극의 주된 언어로 삼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한국연극에서 기록될 사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연극하는 배우들은 표준어를 배운다. 이 작품은 그것에 역행한다. 서양연극에 기초해서 출발한 한국 현대연극의 역사가 80년쯤 된다고 볼 때, 가장 강조했고 동시에 소홀했던 것은 우리말이었다.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라는 한계에 묶여 사투리들은 모두 사장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무대 위에서 지방 사투리로 연극하는 것은 금기처럼 여겨졌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앞서 극단이 내건 표어를 바꿔, 이 작품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잃어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잊어버리기엔 너무 무서운 진실”인 제주도 방언을 배우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에서 남자는 늙어간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작품의 내용을 두고 한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이들은 여성들이다. 남성은 초췌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등장하는 여성들은 당당한 편이다. 그러고 보니까 연출가 채윤일 작품들 가운데 여성의 삶을 다룬 것들이 많다. 그에게 극장은 집이며, 연극은 그의 삶을 감싸는 여성과 같다. 언어의 명징함으로 이룬 <날개>의 거듭남
이상의 <날개>를 각색한 이 공연이 이번 “2003년 채윤일 연출 시리즈” 첫 작품이다. 1977년에 초연된 이 작품을 이번 공연과 비교하는 일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와 이 공연을 견주는 일도 싱겁다. 연출가가 프로그램에서 밝혔듯이, 소설 <날개>의 재현이 아니라 연극으로 거듭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연출가는 법정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주인공인 김해경(시인 이상 자신)보다는 그와 함께 살았던 여성인 심연심을 더 내세웠다. 그것은 심연심 역을 세명의 배우가 고루 할 수 있도록 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법정 드라마란 사건을 먼저 내세우고, 그 사건의 모든 과정을 낱낱이 드러내는 형식을 말한다. <이상의 날개>는 심연심이 법정에 서서 동거인의 과거를 말하는 것들로 채워짐으로써 새로워졌다. 연출가는 여성 심연심을 무대 중심에 놓고 그가 남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도록 했다. 심연심을 둘러싼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주된 무대공간인 법정에서 그들은 판사·검사·변호사들이고, 심연심의 집에서는 술 마시러 오는 남자 손님과 그 집에서 동거하고 있는 남자 김해경이다.
법정 드라마 형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을 옮기는 언어의 명확성이다. 언어가 사건을 분명하게 담아내지 못하면 형식은 실패하고 만다. 이 작품에서 사건은 애매하고 희미하다. 그런 통에 연출가는 언어 하나하나를 명확하게 발음하고, 분명하게 쓰이도록 애를 썼다. 볼거리가 거의 없는 대신, 관객들은 배우가 말하는 언어를 다시 부풀려 상상해야 한다. 배우들이 힘들어한 점은 연출가 채윤일이 언어에 쏟아붓는 간결함과 명징함을 실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안치운/ 호서대 예술학부 교수·연극평론가

사진/ (한겨레 윤운식 기자)
이것은 한국연극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연극 바깥에 있다는 뜻이다. 극단을 운영하면서 극단 바깥의 단체와 떨어져 있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거리야말로 이들이 연극만을 하면서 우리의 삶과 세상을 번역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공덕으로 두 연출가 앞에는 끊임없이 연극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붐비고 있다. 이 젊은이들은 연극이 가난한 예술이라는 것을 잊고, 옹골찬 예술가 앞에서 자신의 허점을 발견하고 고치고 싶은 욕망으로 행복한 이들이다. 오태석은 <앞산아…>란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맡아 공연하고 있다. 이 작품은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전통연희 개발지원 선정작이다. 그러니까 정부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지원했다는 뜻이며, 이 작품은 그 지원 사업에 적절하다는 뜻이다. ‘특별한 목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라지고 있는 ‘기억’이다. 오태석이 이끄는 극단 목화가 발행한 소식지(2002년 12월12일) 앞면에는 “잃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무서운 진실”이라고 하며 제주도 전통놀이 ‘디딤불미’를 알려주고 있다. 기억은 진실의 동의어다. 무거운 진실을 되살리는 오태석의 집념 이 작품은 제주도 사람들이 겪었던 잃어버려서도, 잊어서도 안 되는 1948년 4월3일에 일어난 이른바 4·3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작품은 맥이 빠져버린다. 이미 오래전에도 이 사건을 다룬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산아…>는 4·3사건을 새롭게 다루거나,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공개하지도 않는다. 관객들이 작품을 보기 위하여 극장엘 들어가면 표를 사야 하고,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간 뒤에는 다시 표준어본과 공연극본이라는 두개의 대본을 구입해야 한다. 물론 의무는 아니지만, 표준어본이 없으면 공연을 다 이해하기 어렵다. 작가 오태석은 이 희곡을 제주도 사투리로 썼고, 동시에 표준어로 고쳐썼다. 공연은 제주도 사투리로 한다. 만약 무대 위에 있는 수많은 오브제들과 배우의 연기, 제주도 사람들이 아닌 이들이 등장해서 내뱉는 몇몇 표준어만 없다면 관객들도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미덕은 제주도 사투리를 연극의 주된 언어로 삼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한국연극에서 기록될 사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연극하는 배우들은 표준어를 배운다. 이 작품은 그것에 역행한다. 서양연극에 기초해서 출발한 한국 현대연극의 역사가 80년쯤 된다고 볼 때, 가장 강조했고 동시에 소홀했던 것은 우리말이었다.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라는 한계에 묶여 사투리들은 모두 사장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무대 위에서 지방 사투리로 연극하는 것은 금기처럼 여겨졌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앞서 극단이 내건 표어를 바꿔, 이 작품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잃어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잊어버리기엔 너무 무서운 진실”인 제주도 방언을 배우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에서 남자는 늙어간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작품의 내용을 두고 한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이들은 여성들이다. 남성은 초췌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등장하는 여성들은 당당한 편이다. 그러고 보니까 연출가 채윤일 작품들 가운데 여성의 삶을 다룬 것들이 많다. 그에게 극장은 집이며, 연극은 그의 삶을 감싸는 여성과 같다. 언어의 명징함으로 이룬 <날개>의 거듭남

사진/ (한겨레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