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슈 코르착이 발견한 아이들의 세상…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는가
누군가 그렇게 물었는가 삽시간에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놓을 수 있는게 뭔지를 그는 이렇게 스스로 대답했다. 그것은 ‘음악’이라고. 그렇다. 쇼팽의 야상곡은 그 입을 여는 순간 벌써 젊은이들 마음을 설레게 하고, 브람스의 독일 미사는 홀연히 영혼을 불러 세워놓곤 했다. 이런 점에서 음악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절실한 호소력으로 추궁하는 목소리를, 거의 이례적으로 야누쉬 코르착(Janusz Korczak, 1878~1942, 폴란드어 발음으로 야누쉬가 맞기 때문에 책제목을 제외한 본문에선 모두 야누쉬로 통일했다)이라는 기인에게서 들어볼 수 있었다.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고투 속에서…
최근 출간된 <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은 코르착의 주요 저서 두 가지를 중심으로 미국의 아동심리 치료학자인 샌드러 조지프가 편집한 글모음인 (1999)를 옮긴 것이다. 이 책은 코르착의 사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1918), <아이들이 존중받을 권리>(1928)의 두 가지 대작에서 발췌한 본문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더욱이 주요 대목마다 코르착의 제자인 이차크 벨페르가 삽화로 그려내 보는 이로 하여금 오랫동안 고요한 상념에 빠져들게 한다. 역자인 노영희 교수(한국교원대)는 각고의 노고를 들여 사람들이 잘 다가갈 수 있도록 다정한 우리말과 글로 풀어내었다.
코르착을 한마디로 소개하면 뭐라고 할까 교육문필가 의사 교사 아니면 소크라테스 같은 기괴한 철학자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비할 데 없이 독창적인 교육문필가로 만나지만, 그의 작품들이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하루하루 감당하기 어려운 생의 고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이례적 삶의 사건’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야누쉬 코르착은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아이들을 소재로 한 문필활동과 의학공부로부터 그의 청소년기와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평생을 소아과 의사로 일하지만, 의사란 실은 버려진 아이들을 돕고 그들과 벗하기 위한 도구일지언정, 사회 명망가로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동화에서부터 수필식 이론서, 강연과 논문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쓰기는 오늘날 ‘이야기 교육학’이라는 양식에서 손꼽아볼 수 있는 탁월한 사례에 속한다. 그의 주요 저서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아이들이 존중받을 권리> <헨센 1세>(1923) 같은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폴란드 국경을 넘어 인근 국가로 그리고 차츰 전 세계로 널리 알렸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찢어지는 비통함이었다. 폴란드에 독일군이 진주하고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이라는 공포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스스로 가스실로 향했던 것이다. 1942년의 이 사건을 역사는 ‘실종’으로 기록하고 있다. 코르착의 사상과 활동은 이른바 ‘개혁교육운동’(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엽 사이-엘렌 케이에서 마리아 몬테소리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에서 짚어봐야 한다. 이 시기 일단의 개혁자들은 어떻게 국가가 손쉽게 아이들의 삶을 독차지하는지, 어떻게 학교 교육으로 삶 전체가 메마른 지식덩어리로 대치돼버리는지 주목하면서, 아이들과 인간 삶의 본뜻을 밝히기 위한 여러 운동에 참여했다. 코르착은 그런 뜻에서 그가 살던 폴란드에서 폴란드와 유대 어린이들의 삶을 부여잡고 이들을 사랑하고, 이를 글로, 자신의 몸으로 대변하려 했다. 그렇게 그는 온갖 무지와 오해의 희생물이 돼버린 ‘어린이의 변호자’로 나서려 한 것이었다. “조심하세요. 현대에 탄생한 강력한 괴물이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인간이라는 괴물. 그는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지시합니다. 약한 자를 돌보는 듯한 태도는 거짓이고, 노인과 여성의 권리를 존중한다거나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진정한 감정의 대가·시인·사색가는 다름 아닌 아이들입니다. ” 코르착은 1924년 국제연맹(ILF)이 ‘아동인권선언’을 채택하기 휠씬 전부터 ‘아동인권선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국제연맹이 발표한 선언문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는 “선언문은 선의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강요해야 한다”고 했다. 오랫동안의 논란과 작업 끝에 1989년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아동인권협정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코르착 사상에 근거해 폴란드에서 작성한 초안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어린이가 교육, 사회와 의료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 모든 어린이가 착취·학대·전쟁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어린이들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반드시 그들과 상의해야 할 것 등이 명시돼 있었다. 그를 제대로 읽으면 아이들이 보인다 그가 발전시킨 교육방법론에서 우리는 번득이는 독창적 정신을 본다. 그는 영국의 ‘서머힐 학교’(Summer Hill School)와 같은 여러 자유교육운동에서처럼 일찍이 ‘어린이 법정’ 또는 ‘어린이 공화국’이라는 것을 실험했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권위주의적 학교 생활방식이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비판으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민주적 생활과 의사결정 방식, 즉 ‘자기통제의 원리’를 체험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좀더 자세히 코르착의 면면을 대하고 그 본문을 읽어 내려가면, 어째서 이제까지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상할 것 없는 것이 서구 사회 역시 그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위대함은 반드시 당대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제 그를 발견하고 매혹당하고 사로잡히게 되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지금까지 나온 코르착 관련 번역서를 소개한다. 1996년에 나온 그의 대표동화집 <아이들이 심판하는 나라 I·II>(시공사, 1996)가 있으며,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내일을 여는 책, 2001)와 <홀로 하나님과 함께-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내일을 여는 책, 2001) 등이 있다. 단순한 이야기들이 함축하는 사상의 이례성 앞에서 우리 발걸음은 미술 전시회장에서 인상적 그림을 지날 때처럼 그리 쉬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코르착이다. 송순재/ 감신대 교육철학·<처음처럼> 책임편집인

<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 야누슈 코르착 지음, 노영희 옮김, 양철북 펴냄, 8500원.
코르착을 한마디로 소개하면 뭐라고 할까 교육문필가 의사 교사 아니면 소크라테스 같은 기괴한 철학자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비할 데 없이 독창적인 교육문필가로 만나지만, 그의 작품들이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하루하루 감당하기 어려운 생의 고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이례적 삶의 사건’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야누쉬 코르착은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아이들을 소재로 한 문필활동과 의학공부로부터 그의 청소년기와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평생을 소아과 의사로 일하지만, 의사란 실은 버려진 아이들을 돕고 그들과 벗하기 위한 도구일지언정, 사회 명망가로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동화에서부터 수필식 이론서, 강연과 논문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쓰기는 오늘날 ‘이야기 교육학’이라는 양식에서 손꼽아볼 수 있는 탁월한 사례에 속한다. 그의 주요 저서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아이들이 존중받을 권리> <헨센 1세>(1923) 같은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폴란드 국경을 넘어 인근 국가로 그리고 차츰 전 세계로 널리 알렸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찢어지는 비통함이었다. 폴란드에 독일군이 진주하고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이라는 공포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스스로 가스실로 향했던 것이다. 1942년의 이 사건을 역사는 ‘실종’으로 기록하고 있다. 코르착의 사상과 활동은 이른바 ‘개혁교육운동’(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엽 사이-엘렌 케이에서 마리아 몬테소리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에서 짚어봐야 한다. 이 시기 일단의 개혁자들은 어떻게 국가가 손쉽게 아이들의 삶을 독차지하는지, 어떻게 학교 교육으로 삶 전체가 메마른 지식덩어리로 대치돼버리는지 주목하면서, 아이들과 인간 삶의 본뜻을 밝히기 위한 여러 운동에 참여했다. 코르착은 그런 뜻에서 그가 살던 폴란드에서 폴란드와 유대 어린이들의 삶을 부여잡고 이들을 사랑하고, 이를 글로, 자신의 몸으로 대변하려 했다. 그렇게 그는 온갖 무지와 오해의 희생물이 돼버린 ‘어린이의 변호자’로 나서려 한 것이었다. “조심하세요. 현대에 탄생한 강력한 괴물이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인간이라는 괴물. 그는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지시합니다. 약한 자를 돌보는 듯한 태도는 거짓이고, 노인과 여성의 권리를 존중한다거나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진정한 감정의 대가·시인·사색가는 다름 아닌 아이들입니다. ” 코르착은 1924년 국제연맹(ILF)이 ‘아동인권선언’을 채택하기 휠씬 전부터 ‘아동인권선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국제연맹이 발표한 선언문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는 “선언문은 선의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강요해야 한다”고 했다. 오랫동안의 논란과 작업 끝에 1989년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아동인권협정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코르착 사상에 근거해 폴란드에서 작성한 초안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어린이가 교육, 사회와 의료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 모든 어린이가 착취·학대·전쟁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어린이들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반드시 그들과 상의해야 할 것 등이 명시돼 있었다. 그를 제대로 읽으면 아이들이 보인다 그가 발전시킨 교육방법론에서 우리는 번득이는 독창적 정신을 본다. 그는 영국의 ‘서머힐 학교’(Summer Hill School)와 같은 여러 자유교육운동에서처럼 일찍이 ‘어린이 법정’ 또는 ‘어린이 공화국’이라는 것을 실험했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권위주의적 학교 생활방식이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비판으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민주적 생활과 의사결정 방식, 즉 ‘자기통제의 원리’를 체험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좀더 자세히 코르착의 면면을 대하고 그 본문을 읽어 내려가면, 어째서 이제까지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상할 것 없는 것이 서구 사회 역시 그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위대함은 반드시 당대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제 그를 발견하고 매혹당하고 사로잡히게 되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지금까지 나온 코르착 관련 번역서를 소개한다. 1996년에 나온 그의 대표동화집 <아이들이 심판하는 나라 I·II>(시공사, 1996)가 있으며,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내일을 여는 책, 2001)와 <홀로 하나님과 함께-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내일을 여는 책, 2001) 등이 있다. 단순한 이야기들이 함축하는 사상의 이례성 앞에서 우리 발걸음은 미술 전시회장에서 인상적 그림을 지날 때처럼 그리 쉬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코르착이다. 송순재/ 감신대 교육철학·<처음처럼> 책임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