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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하멜이 청어를 봤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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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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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국민식품’ 청어는 조선에도 지천… 둥지식당 과메기를 맛보며 하멜의 고난을 생각하다

사진/ 경북 구룡포에서 부쳐온 둥지식당 꽁치 과메기를 초장에 푹 찍어 물미역·파·양파·깻잎·쑥갓과 함께 김에 싸서 먹으면 비릿하면서도 쫀득쫀득한 맛이 소주병깨나 비우게 한다.
1653년 8월15일, 노란 머리칼에 붉은 수염을 가진 9척 장신 사내들이 어둠 속에서 초췌한 몰골로 제주도 산방산 앞바다에 상륙했다. 이들의 돌연한 출현은 수천년간 외부와의 접촉 없이 평화롭게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온 제주도민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들은 올해로 하멜 표류 350년 되는 네덜란드인 하멜과 그 일행 35명이다.

그해 1월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호는 6월1일 자바섬의 바다비아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곳에서 며칠 동안 휴식한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명령에 따라 스페로호크호로 대만의 안평으로 출발해 6월14일에 도착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네덜란드의 대만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레세르를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나자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30일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했으나 대만해협에서 엄청난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제주 앞바다까지 흘러온 것이다.

하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2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다가 1656년 3월 전라도로 옮겨졌다. 그 동안 14명이 죽고, 1663년 생존자 22명은 다시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잡역에 종사하면서 길고 긴 고난의 억류생활을 계속했다. 어느 때는 당시 조선의 피폐한 농촌으로 구걸에 나서기까지 했으니 이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멜 일행이 억류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행히 작은 배 한척을 마련해 먹을거리를 구하느라 부근 섬들을 내왕하면서 조수·풍향 등을 잘 알게 되었다. 탈출 직전까지 일행 가운데 생존자는 16명이었으나 탈출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하고 8명만이 1666년 9월4일 야음을 틈타 출항에 성공해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했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하멜은 조선에 억류된 13년간의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하기 위한 근거자료로 <하멜표류기>를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제2부 ‘조선왕국기’에는 조선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풍속·종교·교육·상업 등이 실려 있어 저자의 집필 목적과는 상관없이 서양사회에 한국을 최초로 알린 문헌이 되었다.


몇해 전 나는 텔레비전에서 하멜이 군역·감금·태형·유형·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며 전라도 지방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고, 또 조선의 풍물과 풍속을 관찰하는 내용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아주 흥미있게 보았다. 고향의 가족 품에 다시 돌아가겠다는 끈질긴 소망만이 모진 삶을 지탱해주었지만, 나는 하멜이 혹시 당시 경상도·전라도 해안에서 흔히 잡힌 청어를 보고는 그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잠깐이나마 기쁨을 맛보지나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치즈와 함께 청어를 거의 국민식품으로 생각한다. 한번의 칼질로 대가리와 내장을 긁어낸 뒤 소금을 뿌려 저장해놓고 꼬리를 잡고 통째로 입에 넣는가 하면 샌드위치처럼 빵 사이에 끼워먹기도 한다.

최근에는 남획으로 씨가 말라 청어가 잡히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지천이었다. 일찍부터 청어는 소금을 뿌려 말린 관목(貫目)이라는 건제품과 연기에 그슬리는 연관목(烟貫目)이라는 훈제품이 있었다. 모두가 네덜란드식 청어저장법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

과메기는 동짓달 추운 겨울에 잡힌 꽁치를 두름으로 엮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두고 얼고 녹게 하면서 꾸들꾸들할 정도로 말려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겨울철 특미인데, 조선시대의 청어 관목에서 유래한 것이다. 곧 ‘관목’이 ‘과메기’가 된 것이라 볼 수 있고, 옛날에는 재료도 꽁치가 아니라 청어였다.

강남 삼정호텔 뒤에 가면 아주 맛있는 과메기집 둥지식당(02-558-5336)이 있다. 이 집에는 여러 메뉴가 있지만 과메기맛이 특별하다. 주인 이진순(50)씨 남편의 고향인 경북 구룡포에서 날마다 부쳐온 꽁치 과메기를 초장에 푹 찍어 물미역·파·양파·깻잎·쑥갓과 함께 김에 싸서 먹으면 비릿하면서도 쫀득쫀득한 맛이 소주병깨나 비우게 한다(1접시 1만3천원).

신년 초에 몇몇 친구들과 둥지식당에 들렀다. 안주와 술을 시키고는 묵은 신문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이 하멜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2003년에 대대적으로 벌인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입안에는 잠시 뒤에 맛볼 과메기 한점에 소주 한잔을 기다리며 군침이 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340년 전 남쪽바다 어느 어촌에서 청어 관목을 발견하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을지 모를 거지꼴을 한 서양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음식칼럼니스트·학민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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