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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40년 전부터 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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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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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에서 ‘차표한장’까지, 서울 변천사에 대한 서울 토박이의 넋두리

사진/ 한일합방 초기의 남대문통. 오른쪽 멀리 명동성당이 보인다
모든 게 차고 넘치는 서울에서 가장 찾기 힘든 건 서울 토박이다. 친가·외가 모두 3대 이상 서울에서 살아온 순종 서울 토박이는 다들 이민이라도 가버렸는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추석날 아직도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집에 못 가 풀이 죽은 사람들과, 텅 빈 서울의 쾌적함을 보며 ‘늘 오늘만 같아라’라고 시골 사람들의 풍요와는 사뭇 다른 이유로 추석을 반기는 사람들. 서울 토박이는 대개 뒷부류에 속할 것이다.

‘적의 사정거리 위치’에 부담을 느끼다


모든 게 빨리빨리 이뤄진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공룡서울의 팽창만큼 빨리 이뤄진 것도 드물다. 600여년 전 인구 1만명 정도로 제법 큰 고을이던 한양은 조선왕조의 수도가 된 이후 인구 10만명의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규모가 큰 도시가 되었다. 이렇게 신도시로 출발한 한양은 1910년 일제에 강제병합될 당시 인구가 25만명으로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겨우 2.5배 늘어났을 뿐이다. 해방 당시 서울의 인구는 90만명, 이 인구가 10배 이상 늘어나는 데는 불과 40년이 걸리지 않았다. 1800년에 인구 100만명이 된 런던이 인구 800만명을 넘어서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140년. 서울은 그 4분의 1 정도의 기간에 엄청난 공룡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2002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쪽이 이에 반대해 행정수도 문제가 선거 막판의 최대 쟁점이 된 것이야 아직도 독자들의 기억에 생생할 테니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행정수도 문제는 노무현 진영에서 먼저 제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35년 전에 서울 인구가 ‘겨우’ 700만명에 지나지 않을 때 박정희가 제안한 문제였다.

1977년 2월10일 박정희는 서울시 연두순시- 지금은 없어졌지만 박정희는 해마다 연초에는 중앙부처, 서울시청과 각 도청을 연두순시라는 명목으로 방문하였다- 에서 통일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하는 문제를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박정희는 적의 지상포화 사정거리 안에 인구 700만명의 수도 서울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면서 서울의 인구억제를 위해서라도 고속도로나 전철로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이 새 행정수도로 적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정희가 지적한 바와 같이 행정수도를 정하는 문제는 한국전쟁 직후에 실행돼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수도를 옮기면 후퇴가 아니냐는 정치적·심리적 영향 때문”에 서울의 인구가 700만명을 넘도록 거론되지 못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우리의 국력이 “북괴와의 대결시 자신이 있고 모든 면에서 힘의 우위”를 점하게 되었기 때문에 2~3년 전부터 구상해온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도 행정수도 건설에 찬성했다. 신민당은 행정수도 건설이 자기 당이 종전부터 주장해온 것이라면서 뒤늦은 감이 있으나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청와대 중화학추진위원회와 무임소장관실이 행정수도에 관한 문제를 맡기로 했지만, 임시행정수도 추진은 절대권력자의 공개적인 언명임에도 힘이 실리지 않았다. 가시적 조치래봐야 1977년 6월에 ‘임시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과 그해 말에 1978년도 예산으로 입지조사용역비와 관계 공무원의 출장비로 3900만원이 책정된 것이 전부였다. 특별조치법에서 특기할 만한 내용은 땅값이 올라도 그 수용가는 이 법의 공포일인 1977년 7월1일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었다(이 조항은 1997년의 법개정으로 삭제되었지만 특별조치법은 아직도 살아 있다). 그러나 이런 법이 있음에도 행정수도가 들어설 것으로 유력시되던 유성이나 연기군 일대 땅값은 적어도 3배, 웬만하면 수십배씩 뛰어올랐다. 박정희는 1977년 12월7일에 대법원장 등 사법부 요인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행정수도가 건설되면 사법부도 옮겨갈 것이니 서울에 새로운 대법원 청사를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면서, 정부가 몇 군데 후보지를 선정했으나 자신이 직접 후보지를 둘러보면 땅값이 오를까봐 가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1년 10개월간 박정희는 행정수도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수렁처럼, 시궁창처럼 빠져들던 공간

사진/ 1960년대 서울 홍제동 산비탈. 굴뚝청소부가 걸어간다.
행정수도 문제가 백지화된 것은 전두환이 집권한 5공화국 초기였다. 1982년 3월5일 국회에서 당시 국무총리 유창순은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단일계획이 없다”라고 밝혀 정부가 행정수도 건설 구상을 사실상 백지화했음을 밝혔다. 사실 이미 1977년 말부터 행정수도가 들어설 곳으로 예상된 지역에서의 부동산 거래는 거의 중단되어 있었다. 빚을 내어 막차를 타고 땅을 산 사람들은 행정수도 계획이 지지부진하자 울상이 된 상태였다. 또 1981년 제5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입안될 때 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유창순의 발언은 별다른 놀라움을 불러오지도 않았다. 한때 흥분과 기대에 부동산 투기과열까지 불러온 행정수도 건설계획은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 이미 뇌사상태에 빠진 이 계획이 박정희의 죽음 이후 공식적인 사망진단을 받았을 뿐이다.

지금은 더 심해졌지만, 박정희가 행정수도 계획을 발표할 당시 서울은 이미 만원이었다. 아니, 그보다 10여년 전인 1966년에 이미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을 정도로 서울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66년의 서울 인구는 370만명으로 행정수도 구상이 나온 1977년의 딱 절반이었다. 이호철이 “서울은 만원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서울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서울 4대문 안인 사직동 우리 집 앞으로는 심심치 않게 소달구지가 다녔고, 우리 옆집은 동네에 몇집 남지 않은 초가집이었다. 이호철의 소설이 나오기 1년쯤 전에 김승옥은 이전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문법과 감수성으로 <서울, 1964년 겨울>을 내놓았다. 이호철의 서울은 온갖 사람들이 시골로부터 모여들어 수렁처럼, 시궁창처럼 빠져드는 그런 공간이었다. 뿌리뽑힌 자들이 모여드는 곳, 그러나 결코 뿌리내릴 수 없는 곳이 서울이었다. 1960년대에 이미 서울은 만원이었다. 공동묘지까지.

김승옥에게 서울은 서로 간의 소통을 절실히 바라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도 서로 교류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 가운데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거나, 화신백화점 6층 창들 가운데는 세개만 불빛이 나오고 있다거나 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세 사내가 시합하듯 이런 자잘한 기억을 주고받는 모습을 통해 김승옥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 서울에서 소외된 자들의 비애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2002년도 말에 행정수도 건설을 반대한 사람들에게는 인구 겨우 370만명에 도심에는 전차가 다니고, 전찻길을 조금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아직도 초가집이 있는 서울을 두고 작가들이 엄살을 떨었다고 보일지 모른다. 1960년대 중반의 서울, 지하철의 기계음이 아닌 땡땡거리는 전차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최대의 사창가는 서울 중심의 종삼(종로 3가)에 있었고, 4차선 도로가 아니면 웬만한 길에서는 다 공을 차고 놀 수 있었다. 그 뒤 공룡도시로 변해버린 서울과 견줘볼 때 작가들이 엄살을 떤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작가들이 작품을 쓰기 10년 전의 서울과 견줘본다면 서울은 틀림없이 만원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0만명 이하로 떨어진 서울의 인구는 1954년 124만명, 1956년 150만명, 1959년에는 210만명, 1963년에는 325만명으로 급팽창했다.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10%를 넘는다면, 누구를 시장에 앉혀도 이 인구증가를 수용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건설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수구가 제대로 없어서 비가 오지 않아도 진창이 되는 곳이 수두룩했다.


‘불도저’와 ‘두더지’를 아십니까

이호철이나 김승옥 같은 작가들은, 이미 배태되었지만 앞으로 더욱 불거질 문제들을 내다보면서 작품을 썼을 것이다. 서울의 본격적인 변화는 실제로 이들의 작품이 나온 직후 시작되었다. 이제 막 늘기 시작한 자동차를 위해 전찻길은 뜯겨나갔고, 종삼은 철거돼 그때만 해도 변두리인 청량리나 미아리로 밀려났다. 청계천은 ‘말끔히’ 포장되고 그 위에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어 ‘위용’을 뽐냈다. 아파트라는 새로운 방식의 주거공간이 태어났고, 서울의 산들에는 모두 뒤에 달동네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판잣집이 들어섰다. 종삼이 헐려나간 자리에는 청계천-을지로-퇴계로까지를 하나로 묶는 세운상가가 들어서 주상복합건물의 첫선을 보였다. 모든 변화는 불도저라 불리는 김현옥이 시장으로 있을 때 일어났다. 와우아파트가 우르르 무너지면서 김현옥은 물러났지만,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땅 위를 평정한 불도저 김현옥의 뒤를 이은 양택식은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답게 지하철을 놓고 웬만한 네거리에는 지하도를 파서 보행자들을 땅 밑으로 밀어넣으며 서울의 모습을 바꿔나갔다. 육영수 여사가 피격될 때 한 방송사 아나운서가 “슬로 모션으로 봐도 빠르군요”라는 표현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긴 그를 비난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그는 재빠르게 서울의 모습을 바꿔나갔다. 불도저와 두더지, 두 시장을 거치면서 서울은 600년 고도라는 말이 무색하게 옛 모습을 잃어갔다.

서울 인구는 1968년 433만명, 1970년 543만명, 1972년 607만명으로 500만명과 600만명을 돌파하는 데 각각 2년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인구가 2년 단위로 100만명이 늘어나던 서울, 모든 사람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드는 서울을 상징하는 노래가 패티킴의 <서울의 찬가>(1969)였다. 종이 울리고,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고, 웃는 얼굴이 가득한 곳, 처음 만나서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아름다운 서울. 패티킴은 “서울에서 살렵니다”라는 맹세로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환갑을 넘은 지금 보아도 무척 당당하고 아름다운 패티김이 폭발적 젊음을 무기로 뿜어내는 서울 예찬은 ‘무작정 상경’ 대열의 힘찬 행진곡이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서울길이 노랫말처럼 꿈에 부푼 것일 수는 없었다.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나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처럼 현실의 서울길은 슬프고도 머나먼 길이었다. 패티킴은 다시 1973년에 <서울의 모정>을 통해 “네온의 바다”에서 꿈을 꾸면서 “그리운 서울/ 불타는 가슴/ 언제 언제까지나”를 노래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쨍하고 해뜰 날”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서울로 몰려들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쨍하고 해뜰 날”을 노래한 가수가 몇년 뒤 “차표 한장” 손에 쥐고 고향가는 길을 노래한 것은 서울에서의 꿈과 좌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거대한 서울의 고층빌딩 그늘에서 ‘난쟁이’가 되어 ‘낙원구 행복동’에 초라한 둥지를 틀고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마음을 달래며 자신을 위로했다.

새재부터 기어야 했던 곳

어디 서울을 노래한 가수가 패티김뿐이었으랴. 1960년대 초반에도 서울은 맘 좋고 슬기롭고 예쁘고 상냥하고 멋쟁이인 아가씨로 가득한 곳(이씨스터스, <서울의 아가씨>, 1962)이며, 전쟁 직후 서울의 거리는 명동의 네온불이 반짝거리는 명랑한 거리(이경희, <서울의 거리>, 1955)였다. 해방 직후 서울 거리는 웃음이 솟는 태양의 거리로 희망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곳(현인, <럭키 서울>, 1948)이었다. 이런 노래 때문에 사람들이 서울로 모이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힘을 갖고 있는 서울에 이런 노래들이 더해졌을 뿐이다.

서울의 힘은 해방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서울은 저 백두산에 사는 사람들조차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다. 망아지는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지만,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했다. 서울이 얼마나 높고 위세가 센 곳이었는가 하면 사람들은 과천에서부터 기다 못해 저 멀리 새재부터 기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도 이미 서울은 무서운 곳이었다. 물론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라는 말은 그 뒤에 “눈 뜨고도 코 베어 간다”로 더 험악하게 바뀌었지만. 서울은 이미 복잡한 곳이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것은 더 힘든 일이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서울로 모여들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남기면서.

인구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서울은 공간적으로도 넓어졌다. 처음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도읍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한양, 무악(毋岳- 오늘날의 신촌·연희동 일대), 왕십리, 노원 등이었는데, 한양과는 완전히 별개의 땅으로 거론된 이들 지역은 지금은 서울의 지하철 역이름이 된 지 오래다. “한양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와 같이 쓰인 말인데, 서울의 영역이 한강을 넘어 넓어짐에 따라 말이 안 되게 돼 사라져버렸다. 지금 서울의 새로운 중심이 된 강남도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한양에 포함될 수 없는 지역이다. 왜냐하면 한양에서 양(陽)이란 강의 북쪽을 가리키는 말로 한양은 한강 이북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폭발적 팽창이 가져다 준 대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울의 인구증가율은 여전히 전국평균보다는 크게 높지만 매우 낮아졌다. 이는 1970년부터 시작된 수도권 인구 집중대책이 일정한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촌의 과잉인구가 이미 빠져나올 만큼 빠져나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서울의 인구폭발이 진정세로 돌아선 대신, 서울 주변이 수도권이라는 이름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서울의 외곽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해 성남·안양·부천 등이 시로 승격했고, 1980년대에만 서울 주변의 13개 읍이 시가 되었다. 1990년대에도 일산·산본·평촌·분당·중동 등지의 새 도시 건설은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초반에는 행정수도 건설 대신 과천에 정부 제2청사를 지었지만, 이는 세종로 정부청사의 사무실난 해결에는 일조를 했으나, 인구나 행정기능 분산이 이뤄지지 못한 채 과천의 서울화를 가져왔다.

서울의 폭발적 팽창으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인구팽창을 감당할 만한 상·하수도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는데, 사회복지망이야 어디 감히 꿈이나 꿀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먼저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며 정보도 주고받고 살아가다 보니, 자연히 학연과 지연을 따지는 연고주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오랜 기간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는 사이에 서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버렸고 모든 권력은 서울에 집중되었다. 옛날에도 시골 사람들은 “서울놈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며 서울 사람들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탓했다. 그리고 “쌀나무도 알고 있는 슬기로운 머리”를 가진 서울사람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서울은 만원이다. 이미 40여년 전부터 서울은 공동묘지까지 만원이다. 서울은 우리가 걸어온 압축적 근대화가 가장 압축적으로 집약된 곳이다. 우리의 대중가요에서 고향은 사랑노래와 더불어 양대 축을 형성해왔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돌담길 돌아돌아” 고향을 그리는 노래는 흘러간 옛 노래가 돼버린 지 오래다. 복잡한 서울에서 고향도 잊은 채 다들 뿌리뽑힌 삶을 살다가 일년에 두번 설과 추석에 지명방어전 치르듯 고향을 찾는다. 서울에서 나서 자란 사람이야 원래 고향이 없다지만, 다 같이 고향을 잃어버린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어쩌다 지방에 갔다가 서울에 돌아올 때면 톨게이트 너머로 뿌연 빛을 발하는 보라빛 하늘을 보며 집에 다 왔다고 안도하는 서울 토박이의 넋두리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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