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출가와 국내 배우가 엮어내는 <보이체크>… 캐릭터에 생명력 부여한 재해석 돋보여
“체력, 그리고 사고와 싸우고 있습니다.” 발목을 덮는 무게가 10kg이 넘는 군복외투를 입고 경사 30도의 가파르고 미끄러운 무대에서 몇 시간 동안 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육체적 노고는 위험한 무대가 주는 긴장감 때문에 배가된다. ‘보이체크’ 역을 맡은 배우 박지일(43)씨는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그는 어제 프롤로그춤을 연습하다 넘어져 이마가 찢어졌다. “피가 줄줄 쏟아지는데 얼른 응급조치만 받고 벌떡 일어서 다시 연기했죠. 월드컵 미국전 때 황선홍 선수처럼 말이죠.”
보이체크의 연인 ‘마리’ 역을 맡은 김호정(37)씨는 “유라(연출가 유리 부드소프를 말함)는 연기 중에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완성된 캐릭터를 터득해 매일 똑같이 연습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매번 새로운 보이체크, 새로운 마리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요구한다. 매일의 연습이 공연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다.”
예술의전당 개관 15돌 기념 공연
예술의전당이 올해 개관 15돌을 맞아 기획한 <보이체크>는 독일 사실주의 작가 게오르그 뷔히너(1780~1824)의 미완성 희곡을 러시아 연출가 유리 부드소프와 국내 배우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선보이는 작품이다. 고전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실험적인 무대구성으로 세계적 연출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부드소프는 <보이체크>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최고 연극상인 황금소피트상을 받았으며, <고도를 기다리며>를 새롭게 각색해 황금마스크상을 수상했다. 그는 지난달 초부터 무대디자이너·안무가 등 스태프와 함께 한국에 머물며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보이체크>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가난한 보병 보이체크는 알코올 중독자인 대위에게 늘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정부 마리와 그 사이에서 낳은 아기를 부양하기 위해 의사의 실험도구로 제 몸을 내준다. 하지만 정작 마리는 야성이 넘치는 군악대장의 유혹에 넘어간다. 자신에게는 ‘성녀’와도 같은 마리가 부정을 저지르자 보이체크는 비애와 분노 속에 몸을 떨다 마리를 죽이고 저 역시 자살에 이른다. 뷔히너는 이런 에피소드들의 얼개를 느슨하게 짜놓았는데, 부드소프는 이를 탄탄히 죄고, 살을 입히고, 색깔을 칠했다. 예술의전당쪽과 함께 이번 연극의 번역을 맡은 함영준 교수(단국대 서양어문학부)는 “원작이 계급적 전형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내세워 계급갈등과 억압·수탈의 사회구조를 선명히 부각시킨 데 비해, 부드소프는 가해자조차 피해자와 다를 것 없는 소외된 인간이라는 시각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작품에서 배우들 하나하나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하중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 1월8일 저녁 7시 예술의전당 연습실. 아코디언의 구슬프고 격렬한 멜로디가 울려퍼지자 등장인물들이 일제히 탱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극중에서 보이체크를 학대하는 대위와 의사는 프롤로그춤에서도 그를 짐짝처럼 내동댕이치고 짓밟으며 앞으로의 험난한 삶을 암시해준다. 푸른 눈의 연출가는 노트를 앞에 놓은 채 배우들의 한 동작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매순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 순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배우들의 표현력과 집중력을 감지하는 세계 공통의 안테나를 바짝 올렸다.
몸짓으로 소통… 백치 칼의 비중 높여
다른 연출가들과 달리, 부드소프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인물은 백치 칼(장현성 역). 원작에선 몇 마디 대사밖에 나오지 않는 바보에 불과한데, 부드소프는 이를 적극적으로 살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해설자인 동시에 마리의 아기, 보이체크 내면의 분신, 친구 등 여러 가지 역할을 맡겼다. 무대 곳곳에 뚫려 있는 구멍들에서 돌출적으로 등장하는 칼은 배역 대부분을 뛰고 구르고 춤추는 등의 몸짓 연기로 채워 극 전체에 신비로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부드소프의 손길을 거쳐 대위와 의사도 더욱 성격이 풍성한 캐릭터로 살아났다. 군대의 직속 상관으로 보이체크를 사정없이 부려먹는 대위(이대연 역)는 이번 작품에서 주정뱅이의 무기력함을 진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보이체크, 너는 착해…. 아니야, 너는 비도덕적이야.” 보이체크의 시중을 받으며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대위는 잔인한 가해자가 아니라, 알코올 중독자의 측은한 모습이다. “완두콩만 몇달째 먹여 인간을 당나귀로 전환시키는” 실험을 하는 의사(윤주상 역)도 허세와 변덕으로 뭉친 인물. 배움이 없는 보이체크보다 말발에서 밀리는 그는 이중적인 지식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드소프는 이를 코믹하게 그려 과히 밉지 않은 인물로 묘사했다.
에필로그춤에서 칼은 자멸한 보이체크를 상징하는 뜻에서 목 잘린 인형을 들고 춤을 춘다. 반면 대위와 의사 등 보이체크를 괴롭혔던 이들은 각자의 옷을 들고 나와 춤춘다. 몸뚱어리가 빠져나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옷에서, 인간성을 잃고 헤매는 삶의 공허함이 전해진다. 관객들에게 ‘저들은 저렇게밖에 살 수 없구나’라는 깨달음을 주고자 의도된 장면이다.
이번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부드소프와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연극예술 아카데미 출신인 알렉산드레 쉬시킨이 디자인한 무대다. 무대 전체가 관객쪽으로 쏠리도록 경사가 져 있는데, 검은 나무판 위에 양철을 덧대고 군데군데 구멍을 뚫어 자칫 발을 헛디뎠다간 넘어지기 십상이다. 이렇게 까다로운 무대를 만든 데 대해 연출가는 “우리가 사는 곳은 평평하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이 바로 이렇게 미끄럽고 위험한 지붕 같은 곳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미끄러운 경사길로 치닫는 삶의 현장
커튼콜 연습을 끝으로 배우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부드소프의 거침없는 총평을 들을 순서. 개막일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의식한 듯 그는 20분 넘게 배우들을 몰아쳤다. “연극의 형태는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독일 병사들의 일상이 아니다. 이것은 성서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 인식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극중 누구를 연기한다는 걸 잊어라. 내가 바로 그 ‘누구’ 자체가 돼라.”
수십년 동안 연기생활을 해온 관록 있는 배우들도 부드소프의 원칙적인 잣대 앞에선 숨을 죽였다. 내일은 오늘과는 또 다른 얼굴의 <보이체크>가 탄생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1월14일~2월2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문의 02-580-1300).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유리 부드소프. 러시아 연극계가 주목하는 유리 부드소프는 고전 해석에 뛰어난 세계적 연출가다.
예술의전당이 올해 개관 15돌을 맞아 기획한 <보이체크>는 독일 사실주의 작가 게오르그 뷔히너(1780~1824)의 미완성 희곡을 러시아 연출가 유리 부드소프와 국내 배우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선보이는 작품이다. 고전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실험적인 무대구성으로 세계적 연출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부드소프는 <보이체크>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최고 연극상인 황금소피트상을 받았으며, <고도를 기다리며>를 새롭게 각색해 황금마스크상을 수상했다. 그는 지난달 초부터 무대디자이너·안무가 등 스태프와 함께 한국에 머물며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사진/ 마리와 보이체크. 자신의 절대적 삶의 가치인 마리가 ‘성녀’가 아닌 ‘탕녀’로 드러나자 보이체크는 더 이상 비참한 삶을 견뎌내지 못한다.

사진/ 연습장면. <보이체크>는 러시아의 정상급 연출가와 한국의 최고 배우들이 만나는 무대다. (김종수 기자)

사진/ 연습장면. (김종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