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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금기를 넘어 혁명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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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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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뉴웨이브 주도한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이후’라는 문제의식을 풀어낸 대표작 상영

전후 일본 뉴웨이브의 대표적 감독 오시마 나기사의 회고전이 1월18일부터 문화학교 서울(02-533-3316) 주최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지난해 초 한국에서 회고전이 개최된 스즈키 세이준과 더불어 1950년대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 영화계에 입문한 오시마는 대단히 이단적이며 가장 지적이고 철학적인 감독으로 손꼽히는 일본 영화계의 거장이다. 한국에서 몇 차례 그의 영화가 소개된 바 있지만 이렇게 그의 대표작 12편을 한꺼번에 볼 기회는 없었다.

그 뒤를 주목한 새로운 물결의 기수

오시마의 영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터부’와 ‘혁명’이라는 말이다. 그의 영화는 사회에서 무언가 금기시된 것을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1932년에 태어난 오시마 감독은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전전의 역사에 대해 일종의 부채의식이 있었던 사람이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뒤 그의 아버지 세대들은 전쟁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었고, 이런 현상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까지 일본에서는 전전 시대의 영화감독들이 너무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 등의 세계적 거장들이 포진한 일본 영화계에서 오시마와 같은 20대 젊은 감독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전전 세대 감독들은 전후 일본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발언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한 젊은 영화인들은 전전 세대 영화감독들과 달리 전후 일본의 변화를 혁명적으로 담아낼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새로운 물결의 대표적 기수가 오시마 감독이었다.


<일본의 밤과 안개>(좌), <청춘 잔혹 이야기>(우)


오시마의 영화는 한마디로 ‘무언가가 벌어진 이후의 영화’라 말할 수 있겠다. 가장 거대한 ‘이후’의 문제의식은 물론 2차 세계대전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오시마에게 ‘이후의 문제의식’은 바로 ‘혁명’이었다. 대학 동창의 결혼식 피로연에 모인 학생운동 선후배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격렬한 정치적 논쟁을 벌이는 <일본의 밤과 안개>(1960), 이상적 농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청년들의 시도가 좌절한 이후 발생한 성과 폭력, 광기의 문제에 대해 탐구한 <백주의 살인마>(1966), 도쿄대학 점거투쟁이라는 사건을 영화 매체에 대한 성찰과 결부시킨 <도쿄전쟁전후비화>(1970), 그리고 결혼식·생일·장례식 등을 중심으로 전후 일본이 걸어온 25년의 역사를 총괄하는 <의식>(1971)과 같은 영화는 한마디로 ‘비화’, 즉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비화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과거에 벌어진 일들, 가령 학생운동의 혁명적 실천, 좌절, 분열과 해체 등과 같은 일들이 집단 내부에서 숨겨진 채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우연한 사건 때문에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오시마의 영화에는 그래서 늘 이전의 역사와 이후의 역사가 현실이란 무대 위에서 공존하는데, 종종 과거사를 들춰내는 기법으로 초현실주의적 공간과 회상기법이 자주 사용되곤 한다.

이전과 이후의 공존… 한국인 다룬 작품도

일본 뉴웨이브의 혁명적 걸작으로 평가받는 <청춘 잔혹 이야기>(1960)는 현대의 본질을 ‘잔혹성’으로 파악한 작품으로, 1950년대 일본열도를 휩쓴 학생운동이 좌절한 뒤 감독 자신이 느낀 초조감이 반영된 영화다. 이 영화에는 사상과 혁명을 신앙처럼 섬긴 학생운동 세대와 욕망의 분출에 사로잡힌 이보다 더 젊은 세대 간의 갈등과 연대가 표현되어 있다. 학생운동 세대였지만 지금은 초라하게 현실에 안주한 아키모토는 자신과 함께 열정을 태웠던 여자친구에게 “돌이켜보면 우린 세계를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청춘을 바쳤어. 하지만 실수도 많이 했고, 방법도 몰랐어. 돌을 던져도 벽은 무너지지 않아. 우린 지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지”라고 씁쓸하게 말한다.

오시마의 정치적 의식은 한국인을 다룬 일련의 영화에서도 돋보인다. 오시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본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일본에 남아 비참한 생활을 하는 재일 한국인에 관한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을 만들면서 한국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64년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윤복이의 일기>(1965)는 오시마가 당시 한국을 방문해서 찍은 가난한 소년들의 스틸사진으로 만든 영화로 전쟁으로 황폐화된 거리, 경제적·정치적으로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는 한국의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공감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오시마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물론 한국 자체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일본에 대한 자기반성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교사형>(좌), <감각의 제국>(우)


오시마는 ‘일본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재일 한국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그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런 오시마의 사고를 읽을 수 있는 영화가 1958년, 두명의 일본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63년에 사형당한 재일 한국인 학생의 실화를 소재로 만든 <교사형>(1968)이다. 강간, 살인죄로 기소된 재일 한국인 R은 교사형에 처해지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형은 실패되고, R은 기억상실증에 빠져버린다. 이때부터 사형 집행관들은 R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 그의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재일 한국인에 가해진 일본 사회의 차별과 국가의 압정, 극단적 민족주의를 R에게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형>은 한국인이라는 타자를 빌려 일본의 국가권력을 바깥에서 비판한 걸작이다.

혁명의 좌절, 새로운 출구를 찾아서…

오시마의 이후 작품들은 주로 과거사를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적 충동과 성에 대한 탐구를 주로 다뤘다. 남녀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과 열정을 다룬 <감각의 제국>(1976)과 <열정의 제국>(1978),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본군과 영국군 장교 간의 미묘한 성적 갈등을 다룬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1983)에서 오시마는 60년대 영화에서처럼 혁명적 정치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시마는 혁명의 60년대가 끝난 뒤에 현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모두 붕괴하고 이상 또한 파괴돼버렸다고 탄식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이후 현실을 제재로 하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며, 또 명백한 정치의식보다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내면적 충동들(성적 충동, 범죄의 욕구, 죽음에의 갈망 등)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은 또한 시대의 반영이기도 하다. 좌절된 혁명과 새로운 욕망의 분출, 소비사회의 심화, 현실정치에 대한 무관심 등. 이런 문제의식들이 그의 영화를 또 한번 새롭게 변모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회고전은 오시마의 그런 ‘이후’의 문제의식을 통해 역사와 정치, 혹은 혁명과 좌절, 새로운 욕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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