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회현동 중고음반 시장을 가꾸는 사람들… 전문가급 주인에 단골 손님이 어울려 명성 쌓아
2002년 12월31일. 평일인 이날 서울 명동 거리는 퇴근시간이 되기 전부터 제야를 즐기려는 인파로 붐볐다. 명동 대연각 빌딩 옆 지하도로 들어서자 곳곳에 수북이 쌓인 LP레코드판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회현 지하상가에 특구를 꾸린 중고음반 시장이다. ‘리빙사’는 이곳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음반 가게답게 LP와 CD로 가득 차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다닐 공간만 있다. 유승업(31·회사원)씨가 중고 CD 선반을 뒤지기 시작한다. “이곳을 돌아보기 시작한 게 6~7년 정도 됐어요. 우연히 알게 됐는데 어릴 때 들은 80년대 팝이나 김광석 같은 가요를 주로 찾아요. 가격도 저렴한데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일주일에 한번은 꼭 들러요. 신보는 인터넷으로 구입하죠.”
가렴한 가격에 구경 재미 쏠쏠
리빙사는 ‘중저가의 보고’다. 장르를 불문하고 소리 나오는 건 전부 다 갖추었다고 봐도 좋다. 클래식 CD는 3천~8천원, 팝송은 3천~7천원, 가요는 4천~5천원에 판다. 정상가의 절반 이상 싸게 살 수 있는 가격대다. 1960년대 명동 ‘달러 골목’에서 시작해 이곳에는 89년에 둥지를 틀었다. 건너편 ‘클림트’는 클래식 전문으로 3만여장의 LP판을 갖추고 있다. 빵모자를 지그시 눌러쓴 할아버지 한분이 들어선다. “어제 바그너 두장을 사갔는데, 한장에 흠이 있더라고. 바늘이 깨질까봐 바꾸려고 왔어.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게 나을까 ”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호남형의 주인 김세환씨는 클래식에 관한 한 전문가급이다. 할아버지가 고른 두장의 바그너 음반을 휙 둘러보고 말한다. “판 상태는 둘 다 괜찮네요. 미국판이 말쑥하지만 독일판이 좀더 나을 겁니다. 디자인도 좀더 예술적이지 않아요” 거리가 제법 되는 강남 대치동에 사는 할아버지는 학생 때부터 음반을 모으기 시작했고 지금은 운동을 할 겸 이곳에 종종 나온다고 했다. “LP로 듣다가 남들처럼 CD로 바꿨는데 다시 LP로 바꾸고 있어요. CD는 귀가 따가워 못 듣겠어. LP를 모으고 듣다 보면 학생 때 추억이 떠올라 좋기도 하고. 여기 사장님은 인상이 좋고 멋쟁이인데다 가격도 적당해서 단골이 됐어요.”
6년 전만 해도 회현 지하상가 중고음반 가게는 네곳에 지나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아래 숨어 있는 소장품들이 환전을 위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며 상점 수가 급격히 늘어나 지금은 13곳이나 된다. 30대와 60대 등 연령대에 상관없이 음악 애호가들이 이곳을 찾는 까닭은 회현 지하상가가 꾸준히 번창하는 이유를 잘 요약해준다. 제각기 특색을 갖춘 음반 가게가 한곳에 모여 있어 원하는 장르의 음악을 적당한 예산에 맞춰 ‘한방’에 쇼핑하기 좋다. 젊은층은 여러 장르 CD를, 중년과 노년층은 기름기 빠진 소리를 들려주는 아날로그 LP를 저렴한 가격에 사간다. 리빙사나 클림트는 500명 정도의 단골 규모를 자랑한다. 중고음반 시장 규모가 국내의 10배를 넘는 일본에서도 일부러 건너와 수십장씩 대량으로 구입하는 이들도 있다. 가격의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IMF 때 소장품 폭증… 다양한 장르 모여
그런데 많은 손님들이 조만간 불편을 겪게 생겼다. 오는 3월부터 이곳 지하상가 일대가 개·보수를 위한 공사에 들어가 11월께 마무리될 예정이다. 그동안 음반 가게들이 불가피하게 떠돌이신세가 돼야 한다. 명동 부근에 임시로 운영할 가게를 구한 곳도 있지만 그냥 집으로 들어가 단골과 거래를 계속하겠다는 상점 등 대책도 다양하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는 대로 다시 ‘집결’하리라는 것을 서로 의심치 않는다. “세계 어느 곳을 가봐도 여기처럼 중고음반 가게가 밀집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곳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을 돌아보는 또 다른 재미는 다채로운 음반 가게만큼 개성을 갖춘 주인들에게 있다. 클래식 LP 전문점인 ‘파파게노’의 사장은 전직 내과의사였다. 그는 65년부터 ‘컬렉터’가 됐는데, 국내외 여행을 다니며 하나둘씩 음반을 사기 시작했다. “그때는 판 하나 가격이 서울 변두리 땅 한평보다 비쌌어요. 원판 한장에 5천원이었는데, 수서지역 땅 한평이 500원 할 때였으니까. 의사로 일하면서 번 돈을 음반 수집에 쓰지 않고 땅을 샀더라면 수백억원대 부자가 되었지. 실제로 내 주변에 그런 사람 수두룩해.”
돈 모으기보다 음반 모으기가 좋은 그는 리빙사 단골 손님이기도 했다. 건강이 좀 나빠져 쉬기도 하고 글도 쓸 겸해서 소장품으로 시작한 상점이 문을 연 지 어언 11년째다. 클래식 CD 전문점인 ‘주디 뮤직 그룹’의 심상덕씨는 음악을 좋아한 회사원이었다. 2년 전에 직장을 접고 이 일을 시작했다. 비영어권 음악을 일컫는 월드뮤직에 특화한 ‘디스크. 9’의 구훈씨는 영화와 드라마의 음악감독을 할 정도로 전문가다. 드라마 <모래시계>와 <첫사랑>, 영화 <물 위의 하룻밤> 등에서 선곡을 담당했다. 이곳은 샹송이나 서반어쪽 음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지만 팝·가요는 물론 축음기 음반이나 싱글 음반(일명 도너스 음반)까지 다양하게 갖췄다.
역사가 길다 보니 각별한 단골손님들이 생겨난다. 정유회사에서 평사원으로 시작해 사장까지 지낸 조아무개씨는 리빙사를 수십년 동안 드나든 오랜 단골이었다. 2년 전쯤 건강이 나빠지면서 소장품들을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팔기는 싫었다. 리빙사 정호용 사장(66)이 돈이 싫으면 기증하라고 권하니 선뜻 동의했다. 음대가 있는 대학이면 좋겠는데 서울대는 싫다고 했다. 마침 이곳 단골 가운데 중앙대 음대 교수가 있었고, 정 사장이 다리를 놓아주어 6천여장의 귀한 음반이 이 대학으로 옮겨갔다.
세월의 선율, 그 감동에 빠져보라
‘골동품’에는 희소성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일부 음반은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다. 72년 출반된 방의경의 <불나비>는 100만원을 넘고, 30년대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조곡 모음집은 3천만원을 넘는다. 하지만 이런 희귀음반은 호사가나 극소수 투자자들의 관심거리일 뿐이다. 고가의 희귀음반에 대해 물으면 ‘별 쓰잘 데 없는 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리기 일쑤였다. “희귀음반이라는 게 사실 없다고 봐도 됩니다. 간혹 거래가 있지만 누가 수십만원대, 수백만원대 음반을 선뜻 살 수 있겠어요. 그보다는 1만~2만원대 음반을 많이 갖고 있는 게 낫다는 게 음악 애호가들의 일반적 생각입니다.”
아주 특별한 희귀음반이 아니라면 나름대로 귀히 여기는 건 이런 것들이다. “60~70년대 가수들 가운데는 처음 전속된 회사에서 발매한 것들이 가치가 높은데 이런 초판은 500장 정도에 지나지 않아 희귀성이 높다. 10만원 안팎에서 거래된다. 클래식은 초판을 내고 재판을 찍지 않은 것이 주목을 받는다. 60년대 나온 EMI나 데카의 경우, 레코드 뒷면을 봐서 ALP, 33CX, wide band, yellow band 등이 적혀 있는 게 그런 것이다.”
음악을 즐겨듣는 이라면 시장이 일시 해체되는 3월이 되기 전에 한번쯤 들러볼 만하지 않을까. 클래식 초보자 아무 곳이나 들어가 주인에게 길라잡이를 청할 일이다.
글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lewook@hani.co.kr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음악이 좋아 결혼도 마다하고 음반과 한평생을 같이하고 있는 ‘클림트’의 김세환씨.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시인 김갑수씨 등도 이곳의 단골이다.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호남형의 주인 김세환씨는 클래식에 관한 한 전문가급이다. 할아버지가 고른 두장의 바그너 음반을 휙 둘러보고 말한다. “판 상태는 둘 다 괜찮네요. 미국판이 말쑥하지만 독일판이 좀더 나을 겁니다. 디자인도 좀더 예술적이지 않아요” 거리가 제법 되는 강남 대치동에 사는 할아버지는 학생 때부터 음반을 모으기 시작했고 지금은 운동을 할 겸 이곳에 종종 나온다고 했다. “LP로 듣다가 남들처럼 CD로 바꿨는데 다시 LP로 바꾸고 있어요. CD는 귀가 따가워 못 듣겠어. LP를 모으고 듣다 보면 학생 때 추억이 떠올라 좋기도 하고. 여기 사장님은 인상이 좋고 멋쟁이인데다 가격도 적당해서 단골이 됐어요.”

회현 지하상가 중고음반 시장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리빙사’의 정호용씨. 4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그의 가게는 ‘중저가의 보고’다.

중고음반 시장에서는 각종 음반을 정상가보다 절반가량 싸게 살 수 있다.









